청와대 문고리 3인방의 발탁은 최순실과 정윤회 배경과 권력 형성 과정추적

[코리아데일리 이수돈 기자]

27일 JTBC에서 방송되는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문고리 3인방과 함께 일했던 비서진의 증언이 공개되면서 문고리 3인방의 상전이 공개돼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이미 청와대 일각에서 비서진들이 “문고리 3인방은 사실상 정윤회나 최순실의 비서지 대통령의 비서는 아니었다”고 주장한 이유가 이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한 1998년부터 이들 3인방을 채용하고 업무 지시를 한 장본인이 정윤회와 그의 전 부인 최순실이라는 것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지만 이들에 얽힌 사연은 “이게 나라냐?”는 촛불집회의 구호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27일 최순실, 박근혜, 정윤회, 정호성, 안종범, 이재만, 안봉근, 정윤회, 김종 2:5역학관계라는 내용이 나돌고 있다.

▲ 문고리 3인방을 채용한 최순실 그는 이들의 주인이었다 (사진 코리아데일리 DB)

특히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의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실제적인 파워맨인 정호성 제1부속실장이아무런 관직도 없는 최순실에게 굽실거리는 것에서부터 비선 실세의 대통령론은 등장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를 “최 선생님”이라고 호칭했고 이재만 총무비서관, 안봉근 국정홍보비서관. 안종범, 김종 등 최순실의 수발을 든 흔적이 속속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중 가장 주목을 받는 ‘문고리 3인방’과 최순실-박근혜 간의 긴 역사는 현재 대한민국호를 침몰시키고 있다 세월호처럼.

최순실 .정윤회와 얽혀진 문고리 3인방과의 인연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박근혜 의원이 당선 되면서부터 시작이 된다.

원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경북 문경·예천 지역 보궐선거에 나가기로 돼 있었던 박근혜는 강재섭 등 대구지역 의원들의 요청으로 달성으로 차출됐다.

달성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박근혜 당시 후보를 골목골목으로 이끌었던 안봉근은 선거 때 박근혜 후보 차량을 운전했다.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뒤에는 한동안 의원 운전기사를 겸했다가 나중에는 수행비서 업무와 지역구 관리를 담당했다. 당시 선거를 돕기 위해 달성에 내려와 있던 최순실-정윤회 부부도 이때 안봉근을 처음 만났다.

안봉근 다음에 등장한 근혜 의원실의 보좌진 채용 방식은 독특했다. 보좌진 면접을 의원이 아니라 최순실과 정윤회가 대신 봤다.

선거가 끝난 뒤 채용된 이는 정호성이었다. 고려대 노문학과(1988년 입학)를 졸업한 뒤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마친 정호성은 원래 외무고시를 꿈꾸고 있었다.

학교를 통해 비서관 제안을 받았을 때 진로를 놓고 고민하다가 ‘잠시 그런 경험도 괜찮겠다’는 친구들의 의견에 지원서를 냈다. 이어 강원도의 한 대학에서 아이티(IT) 분야 교수를 하던 이춘상(2012년 대선 직전에 교통사고로 사망)도 박근혜 의원실에 들어왔다.

이재만은 이들보다 1년여 뒤인 1999년 하반기쯤에 합류했다. 최순실과 업무상 가끔 부딪치는데다가 보좌관이 적성에 안 맞았던 양씨가 업무 시작 1년 반쯤 뒤에 관두면서 한양대 과 후배인 이재만을 소개했다. 박사학위를 막 딴 이재만은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었지만, 일자리를 잡지 못해 고민하던 차였다.

최순실과 정윤회가 ‘맑은 사람’을 고른 탓인지 보좌진은 모두 윗사람 말을 잘 듣는 모범생 타입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윗사람 지시는 언제나 100% 이행하는 순종파였다.

이에 대해서 한 정계인사는 “이들 3인방 보좌진을 자기 손으로 고른 최순실-정윤회 부부는 의원실 운영에도 처음부터 깊숙이 개입했다.”면서 “보좌진 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국회 의정활동이나 지역구 관리 문제 등을 일일이 챙겼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들에 따르면, 회의는 사안에 따라 최순실이 진행할 때도 있었고, 정윤회가 진행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가끔 박 의원이 직접 하기도 했다. 회의는 주로 서울 논현동의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빌딩 한층을 몽땅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 최순실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윤회는 회관과 강남 사무실을 왔다 갔다 했지만, 최순실은 회관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의원실에서 공식적인 직책이 없었음에도, 보좌진은 이들을 “최 부장님”과 “비서실장님”으로 불렀다. 정윤회는 박근혜가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해서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 총재 비서실장이라는 공개적인 직책을 처음 가져 실세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박근혜 의원의 국회 질의서나 연설문 등을 처음부터 손봤다. 이들에 대해서 잘 아는 이들과 함께 당시 비서로 있었던 한 인사는 “야인 시절부터 의원을 돕던 분들이라는 얘기를 들어서 그런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많은 부분에 개입했다. 우리가 쓴 연설문들을 많이 고쳤다. 최씨는 개별 지식이 어떤지는 몰라도 크게 보는 눈은 있었다. 연설문의 문맥을 바로잡기도 하고, 자구를 고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일하는 스타일은 달랐다. 최씨는 공격적이고 진취적이어서 앞뒤를 가리지 않는 데 비해 정씨는 이런 최씨에게 브레이크를 걸곤 했다”고 말했다.

최순실 부부는 정책 결정만이 아니라 돈 문제에도 관여했다. 경조사비나 각종 지역구 행사비 등 정치자금이 늘 부족했다. 그때마다 보좌진은 의원이 아니라 최순실 또는 정윤회에게 연락했다. 그러면 바로 돈이 들어왔다고 한다.

의원실의 근무 분위기도 묘했다. 보좌진은 다른 방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보좌관협의회라든지 대학별 동문회 등 국회에 있는 이러저러한 모임에 일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3인방에게 최순실과 정윤회는 처음부터 비선 실세였던 셈이다. 보좌진의 좌장이기도 했고, 때로는 보스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3인방은 최씨 부부의 존재에 대해서 함구로 일관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와 2012년 대선 때 비선이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을 때도 이들은 그런 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들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은 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2012년 12월 말의 어느 날. 박근혜 당선자는 이재만(50), 정호성(47), 안봉근(50) 등 오랜 측근인 보좌진을 부부 동반으로 저녁 모임에 초대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는 측근들의 노고를 치하하거나 고마움을 표하는 대신 섬뜩한 경고를 쏟아냈다. “여러분들이 그동안에도 별문제 없이 잘해왔지만,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한다. 청와대에 특별감찰관을 두고 철저하게 감시할 것이니 아무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한다. 잘못하면 감옥 갈 수도 있다.” 순식간에 참석자들의 표정은 굳어졌으며,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2013년 2월 말 박근혜 대통령을 따라 청와대에 들어간 3인방은 외부인들과는 거의 만나지 않았다. 점심과 저녁은 대부분 청와대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제1부속실장을 맡은 정호성은 일이 많아서 집에도 2~3일에 한 번씩밖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임기 말이 다가오는 시점에 문고리 3인방은 결국 중도에 쫓겨나다시피 청와대를 떠났고 이들은 구속되거나 구속될 운명에 빠졌다

제1부속실장 정호성은 구속 기소 돼 재판을 앞두고 있으며 나머지 2명도 청와대 기록물 반출을 방조했거나(이재만 총무비서관) 최순실의 청와대 출입을 도운 혐의(안봉근 국정홍보비서관)로 주요 수사 대상이다.

2013년 2월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각각 청와대 살림을 총괄하는 총무비서관(이재만), 대통령 집무실을 관장하는 제1부속실장(정호성), 대통령 부인을 담당하는 제2부속실장(안봉근) 등 이른바 문고리 권력을 차지했다. 청와대의 문고리는 모두 최순실에게 통하는 문이기도 했다.

아와 함께 주목을 받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2월 정윤회 문건 파동 수사가 마무리됐을 때 3인방에 대해 “일개 내 비서관이고 심부름꾼일 뿐”이라고 말했다. 3인방을 오랫동안 봐온 주변인들도 “이들이 대체로 사심 없이 성실히 일하는 것은 맞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치 참모로서 그게 다일까. 20여년 의원 보좌관 생활을 바탕으로 ‘보좌의 정치학’을 쓴 이진수(김부겸 의원 보좌관)씨는 “주군의 주파수에만 자신을 맞추는 보좌진은 정치 참모라고 할 수 없다. 한발 떨어져서 보스에게 싫은 소리도 하고 때로는 맞서 싸우기도 해야 참모나 정치적 동지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3인방을 비롯한 보좌진들이 가장 무서워한 것도 정윤회와 최순실이었다고 한다. 2007년 대선 경선 후보 캠프에 참여했던 A씨는 “삼성동 자택에 누가 침입하는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담당 경호원을 자른 게 정윤회 실장이었다. 그가 인사권을 휘두르니 모두 무서워했다”고 증언했다.

또, 안봉근 전 비서관은 정 실장 전화를 항상 일어나 차렷 자세로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도 정호성 전 비서관이 후보 연설문을 만들면, 정윤회와 최순실을 거쳐 연설문이 완성됐다고.할 정도 였으며 이들에 잘 하는 한 천와대 인사는 “정이나 최가 대통령 선거 나가지 말라고 하면, 그 말까지 따를 듯한 분위기였다”고 주장했다.

정권 출범 후 이재만은 총무비서관, 정호성은 1부속실, 안봉근은 2부속실 비서관이 된다. 모두 비서관이지만 위세는 비서실장과 같았다고 한다. 전직 청와대 핵심 관계자 B씨는 “이들 3인방에게 감히 비서관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호성과 안봉근은 ‘실장님’이라고 불렀다. 특히 이재만 비서관은 호칭 앞에 ‘총무’를 빼먹으면 들은 체도 안 했다”고 증언했다.

직급에 맞지 않는 과도한 예우도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26일 한 청와대 인사는 “청와대 경내 유선전화는 발신자의 직급에 따라 벨소리가 다르다. 수석급 이상이 전화하면 사이렌처럼 요란하게 울리는데, 3인방이 전화하면 수석 벨소리가 울렸다”고 전했다.

이어 “비서관에게는 아반테급 소형 차량이 제공되는데, 이들 3인방은 SM5급 중형 차량을 타고 다녔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기춘 비서실장도 이를 묵인할 뿐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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