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니스트/ 시인

21세기 초엽, 시대의 급격한 흐름이다. 남녀노소 구분할 것 없이 1인 독립 가구가 급격히 늘고 있다. 3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 형태는 이제 옛이야기가 돼간다. 머지않아 4인 가족 형태마저 사라질 전망이 나오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홀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누군가의 배려와 응원과 자신의 열등감으로 성장시킨다. 그것은 부끄러울 만큼 나약한 독립불구의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대한민국의 노인 빈곤이 심화되면서 장수는 이미 축복이 아니다. 개인을 넘어 사회적 비극이다. 일자리를 놓고 빚어지는 세대 간 갈등이 그렇고 부양 의무를 져야 하는 젊은 세대와의 반목이 그렇다. 지난해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부모의 사망 시기가 언제쯤이면 좋겠냐는 질문에 응답자 중 상당수가 60대로 답했다고 한다. 부모의 60대는 정년 즈음이다. 이는 고령인구 부양에 대한 부담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대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서로 몸 부비고 살다 보면 저절로 단단해진다. 가족 공동체로 서로 눈 맞추기를 하며 어려운 상황을 함께 이겨내다 보면 나보다는 가족이라는 정의가 완성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역지사지한 마음이 한 몸처럼 베어 이해 못 할 일이 없게 된다. 가난한 부모를 자식이 이해 못 할 리 없고, 부모는 방황하며 흔들리는 자식을 사랑으로 기다려주는 것이 당연지사가 된다. 자신을 사랑해준 조부모가 노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어른이 되면 몇 명의 노인을 책임지게 될까 하는 계산보다는 노인에 대한 측은지심이 세대 간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그것이 본래의 우리 인간 본성이다.

대선을 앞두고 각 당의 후보들이 첨예한 진영 갈등 속에 경쟁하고 있다. 국민의 삶과 안전에 대한 정책은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상대를 비방 공격해 무너뜨려야 한다는 듯 무서운 발언들뿐이다. 국가 미래를 위한 정책대결이 아닌 서로의 부끄러운 약점만을 골라 공격하는 치사한 싸움을 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투표를 거부하고 싶을 정도이다.

칡넝쿨은 오른쪽으로, 등나무 넝쿨은 왼쪽으로 감아 오른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올라가는 두 나무에서 유래한 단어가 칡 갈, 등나무 등, 갈등(葛藤)이다. 하지만 한 몸에 붙었어도 서로 만날 수 없는 두 귀와 두 눈은 한쪽이 병이 나면 남은 한 쪽이 두 배의 능력을 발휘해 보완한다고 한다. 손이나 발처럼 서로 만나 어루만지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하나의 완전체를 위해 기꺼이 배려와 희생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물론 왼쪽 오른쪽 다른 위치에 있으므로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다를 수 있으리라. 그러나 하나의 완전체를 위한 자기희생인 것이다. 지혜로운 국민은 국가의 완전체를 위한 자기희생이 준비된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할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은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데에 권력으로 쓰여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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