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자연의 순리와 섭리는 우리가 더욱 겸허하게 시간을 지키고 세월을 섬기는 이유가 된다.
어느 하루, 바다가 그립고 숲의 향기가 그립고 노을이 그리우면 끝내 향하게 되는 안면도

▲ 사진=안명숙

태안반도 끝자락에 자리한 안면도를 목전에 두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바다보다 먼저 보이는 것이 일자로 곧게 뻗은 소나무 무리다. 일명 안면송이라고 불리는 제법 둥치가 두꺼운 소나무는 그간 지나온 세월까지 오롯이 껴안아 그 위용과 함께 운치가 더 한다. 자연의 오묘함과 웅장함에 연신 탄성을 올리며 굽이돌다 저만치 고요한 서해와 맞닥뜨리면 비로소 도심에서 묻혀간 먼지를 마저 툴툴 털게 된다. 흰 구름 뭉실하게 떠 있는 안면도의 백사장 위에 서니 문득 시 구절 몇 개가 토막토막 딸려 나오고 우리는 곧 맞이하게 될 노을을 기다린다.

갯벌이 부은 얼굴로 돌아누워 등허리를 긁는 날 장벌에는 바다에서 잠깐 발을 뽑은 말장들이 빙 둘러 어깨를 기댄 채 들물에 속이 촐촐한지 꼴꼴꼴 맑은 물소리가 났다 별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밤마다 갯가에는 외로운 불빛들이 일찍 잠들 줄 알고 바람은 까무러칠 줄도 알아 간혹가다 목선도 그저 끄덕거릴 요량으로 궁색한 몸을 움츠리는 것이 보인다 부스스 몸을 털고 갯벌에 올라서는 사람들 서넛씩 둘씩 이 저녁 모닥불에 그리움을 묻었는가 언 손을 펴며 접으며 삭아가는 불을 쬐고 있다 - 전홍준의 ‘안면도’ 전문

시인의 말처럼 ‘별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서해 저문 갯가에는 외로운 불빛들이 일찍 잠들 줄 알고 바람은 까무러칠 줄도 아는’ 곳이 안면도다. 안면도는 유독 바닷물이 맑기로 소문났으며 이곳에는 꽃지, 밧개, 삼봉, 백사장 등 각종 해수욕장이 있다. 그래서 동해 못지않게 여름철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특히 안면도 해수욕장은 경사가 완만해 더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코로나 탓일까. 바닷가에 펼쳐진 색색의 텐트가 더 아름답고 정다워서 마주 앉은 사람들의 밀어가 감미롭다. 저 멀리 색 바랜 소나무 잎이 푹신하게 깔린 황톳길 트래킹 코스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든다.

뭐니 뭐니 해도 서해의 절정은 낙조다. 특히 꽃지 해수욕장을 감싸는 은빛 바람은 사람마저 바람길로 떠밀고 드넓은 백사장이 주인공이 돼 펼쳐진다. 쉼 없이 밀려갔다 밀려오는 물살의 힘은 모래밭을 다져 단단한 땅으로 변신시키고 그곳에서 사람은 잠시 몇 개의 무늬로 남을 뿐이다. 그사이 길을 잃은 갈매기는 꽃처럼 몽글몽글 피어난다.

▲ 사진=안명숙

1989년에 개장한 꽃지 해수욕장은 넓은 백사장과 완만한 수심, 맑고 깨끗한 바닷물, 알맞은 수온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해마다 100만 명이 넘는 피서객들로 붐빈다. 하지만 작년 이어 올해는 그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 조금은 적막한 기운마저 돈다. 백사장을 따라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나 '꽃지'라는 어여쁜 이름을 얻었다는 ​이곳은 물이 빠지면 갯바위가 드러나 조개, 고둥, 게, 말미잘 등을 잡을 수 있으며 오른편에 있는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 너머로 붉게 물드는 낙조는 태안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풍광 중 으뜸이다.

작년부터 2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는 사람들의 일상을 흔들고 자연을 향해 떠남을 막는 타의적 걸림돌이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오로지 떠나기 위해 일상에 머무는 것처럼 갈증을 내보였다. 그러다 어느 하루, 바다가 그립고 숲의 향기가 그리우면 끝내 향하게 되는 안면도는 언제든 누구든 불쑥 찾아들어도 낯선 이방인으로 홀대하지 않으며 맞아준다. 이름 그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깊이 잠들 수 있는 곳.

세상은 소란스러워도 그곳 숲은 여전히 청량한 바람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다만 지난봄 찬란한 자태를 자랑했던 수국이 색을 잃고 생기를 뺏긴 채 탐스러운 꽃잎은 바스락거리고 있지만 이젠 수국 대신 보라색 라벤더가 지천으로 향기를 더하고 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자연과 시간은 무성하던 것들을 어느 순간 말없이 가져가고 그것을 대신할 무엇을 또 말없이 내어놓는다. 우리는 그제야 알아차린다. 잠시의 상실은 더 튼실하고 더 싱싱한 것으로 다시 되돌려 받기 위한 숙려의 시간이란 것을. 그사이 푸른 서해와 뭉게구름 둥실한 하늘을 지켜보는 젊은 연인은 더 아름다운 언어를 위해 잠시 말을 버리고 깊은 갯바닥에 몸을 숨긴 조개를 잡기 위해 구멍을 헤집는 꼬마 아이들은 더욱 애가 탄다.

졸지에 바이러스에게 일상의 평화와 안전을 침탈당한 사람들은 오롯이 자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모두 소란스럽지 않은 몸짓으로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고 숲에 머물며 나무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자연을 청정한 상태로 지키지 못했던 벌이라 여기는지 유난히 겸손한 모습이다. 바다를 타고 흘러오는 한 줄기 바람, 숲길을 걸을 때 풍겨 나오던 나무 냄새가 다만 눈물겹게 소중할 뿐이다. 이제 도심의 바다는 더욱 열기를 품을 테고 서해 안면도의 바다는 그 열기를 식히기 위해 더욱 출렁거릴 것이다. 이 모든 자연의 순리와 섭리는 우리가 더욱 겸허하게 시간을 지키고 세월을 섬기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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