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그늘이 만들어내는 반영으로 온통 초록이 된 물빛, 초록이 주는 가장 확실한 평화였다

▲ 사진=이주옥 기자

입구부터 푸름이 남달랐다. 때는 5월이지만 푸른 나무들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적당한 온기를 나누어 주며 마음에 깊은 평화를 만들었다. 푸른 기운과 새소리가 섞인 흙길에는 서너 팀의 가족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쉬엄쉬엄 걷는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젊은 부부도 있었다. 모두 느릿한 걸음새였다. 꽤 오래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에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의 퍽퍽한 마음 안으로 청량한 바람이 스며들어 부드러워지기에 충분했다. 경북 청송에 있는 주산지를 찾아가는 길에는 문명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푸근한 국도와 얼음골이라고 불리는 곳에 흐르던 폭포수만이 위용을 자랑하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곳은 5월이 무색하게 약간은 오소소 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저수지 한가운데 아름드리 몸통을 담그고 그래도 푸름을 잃지 않고 있는 왕버들의 웅장함. 어딘지 모를 장엄함이 묻어 한기마저 일었다.

주산지는 2003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촬영지로 유명하다. 주산지의 아름다운 풍경은 외국 사람들도 탄성을 지를 정도였다. 주산지는 의외로 그 지역 사람들보다 타지의 사람들이 더 많이 찾은 곳이라고 한다. 영화는 8년 전에 개봉됐는데도 여전히 그 풍광을 보기 위해서 외국인조차 혼자서 찾아올 정도라고 한다. 나는 영화 제목처럼 ‘푸른 봄’에 제대로 찾았다.

옛말에 청송은 ‘끝없는 산길을 걸어 고개를 넘고 계곡을 지나야만 당도하는 곳’이라고 할 만큼 오지 중의 오지다. 그만큼 지형이 험준해 가는 길이 고생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악명 높은 ‘청송교도소’가 그곳에 있었을까. 하지만 자연 그대로 모습과 시골의 후덕한 풍경은 그런 사족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곳’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주산지의 신비스러운 모습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경외할 수밖에 없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 사진=이주옥 기자

주산지는 인공 저수지다. 조선 숙종 1720년에 착공하여 땅을 파고 그 주위에 둑을 쌓아 경종 1721년에 완공했다. 이후 약 300년 동안 모인 산골 물이 고여 저수지가 됐다. 그렇게 유구한 탄생의 유래를 감춘 채 고즈넉하게 존재하던 저수지는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들였고 사계절 아름다운 풍광으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저수지 주위는 주왕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 감싸고 있다. 그런 푸근한 분위기에 신령스러움이 더해져 마치 하얀 수염을 단 신령님이 지팡이를 들고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주산지의 가운데는 ‘왕버들’이 호수 곳곳에 우뚝우뚝 서 있었다. 그 오랜 시간 물속에 뿌리를 담그고서 어떻게 썩지 않았을까 싶지만, 왕버들은 국내 30여 종의 버드나무 중 하나로,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나무의 속성 때문이란다. 수중에서 큰 줄기가 뻗은 왕버들은 주산지 말고는 찾기 어려운 장관이니 새삼 자연의 신비를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수령 300년의 역사만큼 아름드리 둥치의 풍모 또한 남다르다. 그날도 예외 없이 초록 잎을 무성하게 품고 잔잔한 저수지에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그 사이 버드나무가 붉게 물든 가을의 모습과 앙상한 가지에 눈꽃이 핀 겨울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을 했다. 가히 짐작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상이 안 되기도 했다. 다시 그곳을 찾아야 할 이유다.

호숫가에 조성된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가 있다. 잔잔한 물결 속 초록이 빛을 받아 한 폭의 풍경화를 둘러보는 마음으로 초록이 가득 차오른다. 틈틈이 초록이 되지 못한 연두가 더해져 진정한 쉼을 만든다. 산그늘이 만들어내는 반영으로 온통 초록이 된 물빛. 초록이 주는 가장 확실한 평화가 물속 가득한 물고기 떼를 지그시 보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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