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호‘ 눈물속에 살아온 고달픈 인생살이

[코리아데일리 정은채 기자] 가수 배일호는 1957년 2월 1일에 충청남도 논산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75년에 논산고를 졸업하고 밴드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군에 입대하여 전역한 뒤 서해방송의 가수왕 선발대회에서 1위를 하면서 1980년에 〈봐봐봐〉 를 발표하면서 데뷔하였다.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배호 모창으로 실력을 쌓아왔고 배호의 노래를 좋아해서 예명을 배일호로 지었다고 밝혔다.[1]1986년부터 KBS FD로도 활동하면서 KBS《6시 내고향》과《전국노래자랑》의 보조 진행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눈물아픈 사연이 있다. 아내는 대학 졸업장까지 있는데 전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게 마음에 걸렸어요”

▲ 삶의 고달픔을 딛고 일어선 가수 배일호

‘신토불이’ 가수 배일호가 만학의 꿈을 이뤘다. 찢어지게 가난해 초등학교만 마쳐야 했던 그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쥔 것. 3년 동안 공부했던 성지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성지고등학교는 그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대안교육기관으로, 이곳을 졸업하면 정규학력을 인정받는다. 잘 나가는 트로트 가수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이 많았다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

친구들 모두 중학교에 갈 때 종원이는 산에서 나무를 해야 했다. 어느날 지게를 지고 산을 올라가는데 저 멀리 친구들이 깃을 빳빳이 세운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쓴 채 학교에 가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소년은 자기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속상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 눈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술만 먹었던 아버지와 새우젓 장사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던 어머니 사이에 줄줄이 태어난 6남매 중 셋째. 찢어지게 가난해서 소풍 한번 못 가고, 새 책 한번 가져보지 못했으며 졸업앨범마저 제때 받지 못했던 소년은 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학교와의 인연을 끊어야만 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 소년은 중년의 남자가 돼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 99년 중학 속성반을 거쳐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성지고등학교에 입학,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아내는 대학 졸업장까지 있고 동생 녀석들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는데 나만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며 “공부도 공부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쥔 것이 더욱 기쁘다”고 말하면서 넉살좋게 웃었다.

배일호는 말 그대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만큼 고생을 많이 한 경우도 드물 것.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때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땅 한평 없는 고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이라고 별다를 게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소위 말하는 3D직종, 더럽고 위험하며 어려운 일뿐이었다. 공사장에서의 막노동은 물론 포장마차 운영, 보따리 장사, 경리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데뷔 이후 여러 음반을 발표하였으나 1992년에 국산 농산물 애용의 내용을 담은 곡인 〈신토불이〉 를 발표하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대중가수 대열에 합류한다. 특히 배일호 본인이 농가 출신이라는 점과 곡 제목이 〈신토불이〉 라는 점이 겹쳐 농촌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 곡으로 1993년에 93 노랫말 대상을 수상하였고 "신토불이 가수" 라는 별명이 붙었다. 1994년에 황금 만능주의를 개탄하는 새마을 운동의 내용이 담긴 〈99.9〉 를 발표하였고 1998년에는 아내와의 관계를 장모님에게 하소연하는 내용의 곡 〈장모님〉 이 히트하여 제6회 연예예술상 전통가요 가수상을 수상하고 트로트 가수로서 명성을 얻었다.

2002년에는 가창력이 돋보이는 〈꽃보다 아름다운 너〉 라는 곡이 대중들에게 자주 불리면서 전 세대에게 친숙한 곡이 되었으며 KBS 가요대상에서 10대 인기가수상을 2년 연속으로 수상했다. 2004년에 경북과학대를 졸업하였다.

2000년대부터 배일호는 작사·작곡 능력을 겸비하여 싱어송라이터로 활약하기 시작하였으며 본인이 작업한 곡은 〈순이야〉, 〈꽃보다 아름다운 너〉, 〈정말로 정말로〉, 〈당신이 원하신다면〉, 〈친구야〉, 〈오뚝이 인생〉 등이 있다.

근 인생사 고팔픈 이야기로 “서울 올라온 지 얼마되지 않아 싸구려 스웨터 장사를 했어요. 그런 물품이 잘 팔리는 곳은 이른바 산동네죠. 잘사는 사람들이 살 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높은(?) 동네들만 돌아다녔습니다.”

또 일손이 모자라는 농번기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품삯을 받았다. 이렇게 고향과 서울을 왔다갔다 하는 생활을 10년 가까이 계속했다. 그러던 중 아주 우연한 기회로 가수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어릴 적에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저는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모를 심어야 했어요. 하지만 나이가 어려 모를 직접 심지는 못하고 어른들에게 모를 가져다주는 일을 했죠. 그때마다 어른들이 심심하니까 저보고 노래하라고 시켰습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이렇게 노래하면 다른 쪽의 어른들이 ‘거기서만 노래하지 말고 여기 와서도 노래해’라고 하셨죠. 모두 저보고 ‘노래를 무척 잘한다’며 ‘가수가 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부터 은연중에 가수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러던중 고향에서 노래자랑이 열렸어요. ‘이때가 기회다’ 싶었죠.”

충남 서해방송이 주최하는 노래자랑이 그의 고향에서 열린 것이다. 막상 부푼 꿈을 안고 예심을 보려고 했으나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아는 동네 어른의 양복과 구두를 빌렸는데 턱없이 작았다. 그래도 간신히 몸에 꿰고 나가 예심을 거뜬히 통과하고 결선까지 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바지가 너무 작아 순서를 기다리던 도중 터져버린 것. 맞지 않은 구두를 신어 발이 아픈 상태에서 옷마저 찢어져 엉거주춤한 자세로 무대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당당히 최고상을 수상했고 연말대회까지 나가 대상을 받았다. 72년의 일이다.

“뛸 듯이 기뻤죠. 당시만 해도 순진해서 제가 바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가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가수 생활을 30년 가까이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가수활동을 시작했지만 생활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낮에는 생계를 위해 어렵고 힘든 일을 해야 했다. 달라진 것이라곤 밤에는 캬바레, 나이트클럽 등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 인기가수들이 출연하지 않는 막간에 잠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마음속에는 가수라는 바람이 잔뜩 들어갔는데 실제 생활은 거의 바뀌지 않았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오면 아내와 딸아이는 저를 기다리느라 자지 않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호강시켜주지 못할망정 산동네, 언제 연탄가스가 샐지 모르는 작은 사글세방에서 하루종일 저를 기다리게 했으니. 사실 집사람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거예요.”

배일호는 부인 손귀예씨와 18년 전에 만났다. 당시 손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모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사무실에 들른 배일호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것. 둘은 서로 사랑했지만 결혼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육군 중령 출신의 사업가 아버지 밑에서 대학교육까지 받은 손씨가 초등학교만 졸업한 ‘딴따라’ 배일호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당연히 손씨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손씨는 집을 나왔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혼인신고만 한 채 함께 살기 시작했다.

“어느날 밤무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집사람은 사라지고 세살 난 딸아이만 빽빽 울고 있었어요. 처갓집에서 집사람을 붙잡아갔던 거죠. 그렇게 도망치고 붙잡히기를 여러 번, 결국 처갓집도 포기를 하고 저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날 장모님이 제 손에 30만원을 꼭 쥐어주시며 ‘잘 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하지만 요즘은 설날 때 제가 방송 때문에 늦게 가도 처갓집 식구들 모두 떡국도 먹지 않고 절 기다리고 있어요. 딱 가운데 자리를 비워 놓은 채 말이죠. 매년 명절 때마다 제가 갈비와 용돈을 드려서 그런지... 이젠 가장 훌륭한 사위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손씨는 음반 한장 내지 못한 무명가수 배일호를 잘 내조해 주었다. 행여 남편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이른바 높은 사람들 집에 가서 빨래, 설거지를 하며 아이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군인 출신 아버지 밑에서 자라 자존심이 강했지만 남편을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자신을 희생했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일호를 믿어줬다. 그가 하는 일은 다 옳고, 언젠가는 그가 성공해 큰일을 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싸운 적도 많았죠. 하지만 5분을 가지 못했어요. 사과요? 항상 제가 하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사과를 하는 사람도 저예요. 집사람은 제 머리 위에 있는 것 같아요. 항상 제가 어떤 일 때문에 화를 내고 얼마 안 있으면 풀릴 것까지 알고 있으니까 제가 이길 수가 없어요(웃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조금도 쉬지 않고 노력했던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아니 그가 기회를 찾아냈다.

“예전에 KBS의 행운의 스튜디오란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보조 진행자 중 한명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다가 갑자기 ‘내가 보조진행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무작정 KBS에 찾아가 담당 PD를 만났고 ‘내가 보조진행을 하겠소’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의 당당함이 맘에 들었는지 PD도 흔쾌히 허락했죠. 86년의 일이에요.”

그의 역할은 게임 진행자. 유명 연예인들이 프로그램에 나와 게임하는 것을 지도하는 일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프로그램 중간중간 그의 얼굴이 방송을 탔다. 한두 마디 이상은 할 수 없었지만 배일호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재치 넘치는 입담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제작진 회의에서부터 녹화까지 모든 단계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고 인정도 받았다.

“제가 노래를 잘하고 밤무대에 서는 가수라는 걸 제작진도 알고 있었어요. 당시 저는 처음으로 작곡가에게 ‘그래도 못 믿어’라는 노래를 받아 연습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날 출연하기로 했던 전영록씨가 생방송 시작 직전 펑크를 내버렸습니다. 담당 PD가 ‘당장 배일호 준비해’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저는 제 귀를 의심했어요. 제가 텔레비전에 나와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었어요. 얼떨결에 제대로 의상도 갖춰 입지 못한 채 무대에 오르게 됐습니다.”

방송이 끝난 후 반응이 참 좋았다. 방송을 보고 앨범을 내자고 연락해온 음반제작사도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93년 ‘봐봐봐’라는 노래를 타이틀로 첫 음반을 내게 됐다. 평소 곧잘 모창을 하곤 했던 선배가수 배호의 이름을 딴 배일호라는 멋진 예명도 지어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농수산물 수입개방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노래 ‘신토불이’로 스타덤에 올랐다. 쌀 개방 파문과 맞물리면서 농민들을 비롯한 전국민의 사랑을 받게 된 것. 그 후로 ‘99.9’ ‘순이야’ ‘장모님’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인기 트로트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노래 중 상당수는 그가 직접 작사, 작곡했고 지금까지 총 11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KBS 연말대상 성인가요 부문 10대 가수상을 수상했고, 그의 노래 ‘당신 때문에’는 경인방송 성인가요대상에서 1위 자리를 하기도했다.

이렇게 삶의 여유가 생기자 그는 가난 때문에 못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그 결과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다고 한다. 내친김에 대학졸업장도 받을 계획이다. 현재 그는 5개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놓은 상태. 방송연예 관련 학과를 선택하려고 한다.

99년 12월에는 결혼식도 못 올린 채 함께 살며 고생만 시킨 아내 손씨에게 면사포를 씌워줬다. 게다가 하객들이 모아준 축의금 중 1천만원을 이웃돕기성금으로 선뜻 내놓았다. 지난해 봄에는 힘들게 부어온 적금을 깨 가뭄에 허덕이는 농촌에 양수기 30대를 보내기도 했다. 농민 출신인 그에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촌놈이었던 제가 가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농민들과 팬들의 사랑 덕분입니다. 이제 받은 사랑만큼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한결같이 집으로 달려간다는 배일호. 그는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준 아내와 딸 손민이가 고마울 뿐이다. 어린 딸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라 그다지 세대차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손민이는 “일요일에도 항상 일찍 일어나 이것 저것을 시켜 상당히 피곤하게 한다”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공부를 시작한 후에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영어에 대해 물어온다고.

그의 노래에서는 신토불이’에는 가난한 농민으로서 고생했던 삶이, ‘장모님’에는 한때는 야속했지만 지금은 자신을 믿어주는 장모님에 대한 감사가, 그리고 ‘당신 때문에’에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부인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담겨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웃고, 울고, 분노하고, 행복해 할 수 있다. 배일호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우리시대 소시민들의 공감을 이끌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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