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하지 않고 고려의 초기 무장으로 남았으면...뒤바귄 역사 실록

[코리아데일리 정은채 기자]

4일 조선시대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생에가 KBS 역사저널 그날 시간에 방영돼 왕들의 문화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부고 있다.

역사의 실록과 야사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살던 시대적 상황은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으로 상당히 나라가 어수선했으며 이러한 사회적 환경이 오히려 이성계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그만큼 공을 세울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고 이성계는 이러한 고려 말의 혼란한 시대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희대의 무인이자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태조 이성계 초상 (사진 = 국립박물관 제공)

야사에 의하면 이성계는 유년기 아버지 이자춘(환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부터 영특했다고 전해진다.

청년기 때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는데 활을 쏘아서 까마귀를 잡아달라는 부탁에 활을 쏘았는데 무려 5마리가 한 화살에 꽂혀서 죽었다는 말이 전해오고 이에 이걸 본 사람이 "이 일을 발설하면 반드시 후환이 미칠테니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것도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성계는 후에 왜구격퇴에 공을 세우게 되며, 우왕이 권문세족인 이인임을 몰아낼 때 최영과 함께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하게 된다.

그러면서 후에는 요동정벌에서의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라이벌이었던 최영마저 제거하고 실권을 거머쥐게 되고 마지막으로 대립각을 세우던 정몽주 마저도 아들 이방원(후에 태종)이 선죽교에서 죽임으로서 사실상 조선 왕조의 개창을 이룩했으며 후에 공양왕 폐위 되면서 1392년 조선 왕조의 개창하여 도읍지를 한양 오늘의 서울로 하게 된다.

이성계의 업적은 시대를 정확하게 읽는 눈으로 당당히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뛰어난 무관으로 고려 백성들의 신임을 오히려 왕보다 더 받았기에 민심을 헤아릴 줄 아는 현군이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세자 책봉에 있어서 방원을 배제하고 방석(가장 막내, 의안대군)을 세자로 앉힘으로서 사실상 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에 간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왕이었다.

이로 인해 이 고려의 최고 무장이면서 또한 조선의 개국을 주도했지만 이에 비하여 조선의 1대왕으로서는 비운의 생활을 했다.

자신의 두 번째 비인 신덕왕후를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의 아들들이 두 번이나 난을 일으켜서

아들 두 명은 죽음 맞이하였으며 결국에는 태종 이방원에 밀려 권력이 없는 태상왕으로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어지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지 않고 고려의 무장으로 남았더라면 더욱 더 명예로운 삶이 되었을 것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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