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암살 한 안두희 비참한 삶 배후는 누구? 역사의 진실 재조명

[코리아데일리 이옥희 기자]

14일 광복70주년을 하루 남겨 놓고 비운의 죽음을 당한 김구 선생의 죽음에 민족의 슬픔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자세한 그의 성장 과정 등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던 네티즌들은 '돌베개'를 통해서야 어느정도 그 삶을 되짚어 볼 수 있게 되었었다.

▲ 암살 한 안두희 총탄에 민죽의 슬픔을 안고 이 땅을 떠난 김구 선생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면 역시나 임시정부에 대해 느낀 김구선생의 환멸 및 좌절감에 관한 부분이다.

목숨을 걸고 탈영을 하여 수 많은 위기를 넘기고 심지어는 파촉령마저 넘어 도착하게 된 임시정부의 현실은 여러 정당 사이의 이권 다툼으로 그 구실을 전혀 하고있지 못하는 허수아비 정부에 불과했고 이러한 심정은 김구 선생도 마찬 가지 였다.

그러나 이러한 참담함 속에서도 국민과 정치인들이 희망을 가진 것은 바로 김구 선생의 존재였다.

당시 '민족의 지도자'로 불리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 지도자로서 가장 손 꼽히는 사람 중 하나였던 김구 선생은 1949년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하게 된다.

민족의 지도자를 암살한 그의 죄는 씻을 수 없을 것이나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복역 중이던 그는 군 복귀를 하게 되고, 형집행정지 처분마저 받게 된다.

이후 민주화 바람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4.19 혁명으로 물러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섰으나,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제2공화국에서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에 대한 재 처분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그는 그대로 편안한 삶을 살게 될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해진 형벌은 끝이 났어도, 도덕적 비난과 인벌(人罰)은 계속 되었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가시지 않았기에 여러 의인들은 그를 지속적으로 추궁하고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했으며, 일부는 그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하였고 이러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은거하며 생을 이어가던 김구 선생의 암살자 '안두희'는 결국 1996년 버스기사이던 '박기서'씨에게 살해를 당하게 된다.

▲ 암살 당하기 직전 이승만 전 대통령과 정치적인 라이벌 관계였던 김구 선생
박기서 씨와 그의 변호인은 민족의 지도자를 암살한 안두희를 살해한 것은 사회적으로 상당성이 있는 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되는 정당행위라고 주장했다.

물론 도덕적으론 맞는 말이겠지만 법적으로는 당연하게도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박기서씨는 살인의 죄를 받게 되고 대법원 또한 이러한 역사적 사건 및 사회적 인식을 고려하여 '살인의 죄'임에도 불구하고 징역 3년이라는 파격적인 단기형을 선고하고,

이마저도 절반 정도 복역 후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 기념 특별사면으로 형 집행을 면제 받게 되었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권중희의 글을 보고 안두희 살해를 결심했다는 박기서씨.

대법원 또한 판결문에선 '정당행위로 볼 수 없다'라는 법원칙을 천명하면서도 그 형량을 보았을 때는 사실상의 정당성을 인정해준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민족에게는 훌륭한 지도자인 김구 선생의 별세로 한동안 힘겨운 삶을 살아오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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