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지철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코리아데일리 이상규 기자]

10,26 사태로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한 고 차지철 전 경호실장은 암살자인 김재규와 끈끈한 악연의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

이에 대해 차지철을 암살한 김재규와의 연결고리를 살펴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하게 보기가 힘들다.

일단 출신성향부터 10.26사건시절까지를 전부 조명해보면 암살자 김재규의 경우 경상북도 구미근방에서 1926년에 태어나며 1946년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수료하여 소위를 달고 군생활을 시각한다.

그러다가 1947년 군·경 친선 축구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이때에 양측이 경기 중에 주먹다짐을 벌이는 일이 발생하고 결국 이 문제에 대하여 육군본부에서 징계위원회를 연다.
이 때 당직장교인 김재규가 직위해제되었고 이후 김재규는 대구 대륜중학교의 체육선생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소위로 복직되어 승승장구 1961년에는 드디어 준장으로 진급한다.

반면 차지철의 경우는 1934년생으로 아버지가 상당히 바람기가 심하여 사실상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1953년 육군사관학교 12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을 하게 되고 포병간부시험에 합격을 하여 군 생활을 시작한다.

▲ 5.16 군사 정변을 성공한후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서 있는 차지철 당시 대위
그러다가 1958년 지금의 김포에 있는 1공수여단이 처음 창설되었을 때 공수단에 지원하여 공수단 장교가 되었고 이때 만나게 되는 사람이 바로 훗날의 대통령이된 전두환이다.

그러다가 1961년 5월 초순에 서울에 잠시 휴가차 나갔다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박종규 소령의 소개로 서울 명동의 샤보이 호텔에서 박정희 소장을 만나게 되고 곧바로 의기투합하게 된다.

이러한 각자의 사연들을 안고 있는 두 사람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을 때 김재규는 육군6사단장으로 차지철은 공수단 중대장(대위)였다.

그런 가운데 박정희 장군이 공수단을 차출하여 서울까지 진격하여 들어오도록 했고 이에 당시 공수단장이던 박치옥 대령(육사 5기)이 이에 호응 공수단을 서울로 진격시키려고 하였으나 당시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의 병력출동 저지 지시를 받은 서종철 대령등이 공수단 사령부에 들이닥치자 공수단 사령부가 주춤하게 된다.

이때 차지철 당시 대위가 도끼로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와 틴약을 실고 서울로 들어가는 공을 세운다.

이때 서울의 중요다리였던 한강 인도교에 총장이 보낸 저지병력이 헌병 50명 정도가 있었는데 이들을 물리치고 서울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김인식 대위와 이영기 대위등의 동료들과 함께 박정희 장군의 경호대 역활을 맏게된다.

▲ 10.26,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하는 현장검증을 하는 김재규
그 후 김재규는 박정희 장군의 부름을 받고 장군 신분으로 호남나주비료공장 사장이 되어 비료공장의 운영을 맡았다가 다시금 군에 복귀하여 보안사령관과 3군단장을 끝으로 1972년 중장으로 전역한다.

그리고 차지철은 1963년 중령으로 전역한 후 박정희의 도움으로 국회에 진출 4선의원의 길을 걸어간다. 그러던 중 1968년 두 사람이 처음 충돌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3선개헌 문제로 대판 싸운다.

하지만 이때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향한 적당한 충성경쟁이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넘어갔지만1974년 8월15일 국립극장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 벌어지게 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가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자리에 과격파 국회의원 차지철이 김종필 국무총리와 김정렴 비서실장의 추천으로 경호실장에 임명이 된 것.

또 코리아게이트 사건의 휴유증을 극복하고자 신직수 부장을 해임하고 김재규를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던 중에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를 하게 되자 두 사람은 힘을 모아 김정렴 비서실장을 몰아내고 본격적으로 충성경쟁을 벌이게 되고 서로가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을려고 노력한다.

이 같은 충성경쟁은 번번히 김재규 부장이 패하고 마는 것이 차지철이 경호실장의 직을 이용하여 매일 아침 먼저 들어가서 정보보고를 하면서 김재규의 보고순서를 가로채 버리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지게된다.

그리고 각종 정치문제에 간여를 하게 되는데 어떤 면에서는 두 사람이 싸울때 싸우더라도 자신에게는 목숨걸고 충성을 다하도록 하는 박정희식 박치기 충성을 강요한 박대통령이 어느 시점에선가 차지철을 좀 더 총애하게 된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필하는 김재규 (우측)
여기에 늘 위기의식을 느끼던 김재규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서게된다.
1979년 5월에 있었던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차지철이 이철승의원을 지원하나 김재규는 김영삼을 지원하면서 당시 연금 중이던 김대중의 연금도 풀어줄 정도였다.

결국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되자 두 사람은 관계가 폭팔 직전까지 가게 됐지만 신민당에서 내분이 일어나 김영삼 총재가 직무정지가 되면서 상황이 다시 꼬이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당시 분위기는 정보부장으로 무능하다는 평과 함께 다른 사람들이 하마평에 오르게 되자 결국 김재규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고 1979년 10월26일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를 풀기위해 김계원 비서실장이 두 사람의 화해 술자리를 주선하였으나 이미 마음이 서버린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아버리고 박정희 대통령까지 쏘아버린다. 결국넘어서는 안될 숙명의 관계가 끝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코리아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