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한열군 장례행렬에 추모인파 100만여 명

1987년7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故 이한열군의 장례행렬이 시청광장에 도착하자 차도까지 가득메운 시민, 학생들의 눈물바다로 변했다.(사진 왼쪽). 6월항쟁 - 故 이한열군 장례행렬에 추모인파 100만.
1987년7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故 이한열군의 장례행렬이 시청광장에 도착하자 차도까지 가득메운 시민, 학생들의 눈물바다로 변했다.(사진 왼쪽). 6월항쟁 - 故 이한열군 장례행렬에 추모인파 100만.

35년전의 6.10 민주항쟁은 수 십 년에 그친 권위주의 통치를 국민이 주체적으로 청산시켜 민주화의 기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민들의 열망을 통해 이루어진 민주화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6월 민주항쟁은 1987년에 전국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입니다.

1987년 초 운동권 박종운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운동권 후배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은 갖가지 고문을 가한 끝에 사망하자 고문 사실을 은폐한다. 

이후 사망 사실을 보도하며 경찰은 심문 중 책상을 탁 쳤더니 박종철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했고, 이에 신문 헤드라인으로 보도된 것이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더라"였다.

박종철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수많은 고문이 있었음이 드러났고, 국민들은 이 사태에 크게 분노했다. 이후 해당 고문 경찰들도 처벌됐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냐, 의원 내각제로의 개헌이냐 하는 논의를 뒤집어 엎어버리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며 개헌 논의를 1988 서울 올림픽 이후로 미뤘고 직선제로의 개헌을 갈망하던 국민들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크게 분노한다.

6월 10일 전국 각 대학에서 집회가 예정되었고, 하루 대학별 교정에서 사전 집회가 열렸다.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펼쳐진 사전 집회 이후 교문 앞으로 진출하던 학생들에게 경찰이 규정을 무시하고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직사 했고, 이한열 학생의 후두부에 직격 한다. 이한열 학생은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사망했고 자리에 있던 로이터 통신 기자에 의해 그 순간의 사진이 뉴욕 타임스 1면에 실리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1987년 6월 10일 '국민운동 본부'가 주관한 대규모 시위가 서울 시청 광장에서 열렸다. 정부는 이 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대한성공회 서울 주교 성당 봉쇄,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 제거, 수도권 전철의 시내 구간 무정차 통과, 단축수업과 조기 퇴근 등 수많은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해당 조치들로 인해 시위는 더욱 커지게 된다. 조기 퇴근한 직장인들이 무정차 전철에 의해 귀가하지 못하고 6월 10일이었던 여름 날씨에 해가 너무 밝아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서울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일어나고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경찰들의 진압이 바로 이어졌다. 경찰에게서 피신한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면서 '명동성당 항쟁'이 시작되었다.

이 명동성당 항쟁은 이후 6.10 항쟁, 6월 항쟁으로 시위가 이름 지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성당 안 시위대를 경찰에게서 막아섰고, 88 올림픽을 앞둔 정부는 올림픽의 무산을 우려하여 성당 내에 진입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지 못했다.

명동성당 항쟁 이후 주말이 되어 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월요일이 되자 시민들은 더 큰 규모로 시위를 시작했고 매일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치안력의 한계에 접어든 경찰은 바닥난 최루탄과 함께 시위대에 밀리는 일이 허다했다.

이에 전두환은 군부를 이용해 병력을 동원, 무력진압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88 올림픽 직전이었던 대한민국은 전 세계의 관심 속에 있었고, 평화와 화합의 상징 올림픽의 개최국인 한국에서 군부가 국민을 진압하는 일은 벌어질 수 없었다.

뉴욕타임스 보도 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의 여론은 좋을 수 없었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한국에 대통령 친서를 보냈다. 친서를 전달한 주한 미국 대사는 계엄령을 선포할 경우 한미동맹을 저해하는 것이라며 압박했다.

현장 사령관 및 기타 군부들 조차  무력 진압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대장급 지휘관들과 정부는 크게 당황했고, 결국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수용되며 약 100만여 명이 참여한 7월 이한열의 장례식과 함께 사실상 6월 항쟁이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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