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자

요동 

                                                                              

고현자 시인
고현자 시인

 

사푼사푼 

하늘거리는 요염

흰 백으로 물들일 때

 

어스름 내리는 창밖

절규하는 향기에

갈기갈기 찢기는 심장

고요한

눈빛 속삭임

익숙한 음성의

메아리

귓전에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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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

 

속살 고스란히 드러낸 창문너머로

걸어 나온 새싹의 냄새에

도사리듯 앉아 있던 애꾸

신발을 신는다

게으른 눈을 깜박이는

만삭의 먼지 타래가

아수라장인 채 방치된 거실은

진공기 소리만이 분주하다

안방까지 쳐들어와 

햇살을 수유하는 봄

한점 빛도 허락하지 않는 앙다문 눈은

벌써 쫑긋 나온 셔터를 누르고 말 기세다

아지랑이 가득 찬 한나절임에도

한 발짝도 떼지 못한

호수 같은 왕눈이

애꿎은 계절만 원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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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면

 

아무 탈 없이 푸르다

작은 빛이 잠깐씩 잇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야금대는 음량의 연풍

균형과 조화를 이룬

굉걸하고 갸륵한 선율

낱낱의 이파리가 서로 비빈다

방울방울 골수에 맺힌 이슬

정간에서 갈라져 나온 줄기마다 

흥분을 실었다

송두리째 투명한 창극엔

귀하의 선연한 형상

변변치 못한 육신에도

나이를 먹지 않는 맥박

퍽이나 용솟음친다

봄이 아프다

바람 소리 알싸하고

나무의 움트는 몸부림 

말수가 많고 수다스럽다

눈 녹은 자리 새싹 잉태하고

어둠 내린 숲속엔

소쩍새 투정 소리 처연하니 애달프다

적막이 곧추서있는 밤

삐걱거리는 뼈마디의 비명

얼음 녹아내리는 도랑 물소리

도사리듯 심장 속으로 파고든다

흰머리 무수히 밀어내는 오십견

수분기 죽어가는 초라한 육신

봄이 오는 소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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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風蘭)

오롯한 속살이 적막을 곡예 하는

오롯한 속살이 적막을 곡예 하는

허기에도 채기가 있는지

움켜쥔 화분을 꺼이꺼이 기어 나온다

겹겹이 꼭 다문 붉은 입술

처절한 고요를 뜯어내는 전율이

몰약보다 더 치명적인

깊이 드리워진 오르가즘

밤마다 비릿한 달빛 한 입 훔쳐

꽃으로 환생하는 알싸한 요염

태초부터 고고한 기상일랑

벗어던져야 할 정한 이치였나

숨겨 두었던 단아한 향기

손끝을 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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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芽 )

 

도린곁 오솔길

마알간 초유의 햇살과 

노박이로 내통한 애젊은 참나무 

온몸이 몽롱한 오르가슴을 한다

몰핀보다 강한 예그리나

흔적을 확인하는 봄을 잉태한다

생명의 신비인가

텅 비우고 있는 숲에서

만삭의 산통을 겪어 내고 있다

곧 뽀송뽀송한 

연초록의 새싹을 함초롬히 부화하겠지

예그리나(순우리말)사랑하는 우리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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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마중 

 

강가 긴 언덕배기   

파란 겪어낸 투박한 손등에  

새뜻하고 진한 꽃이 피겠지    

한 잎 두 잎  

풀잎도 갈맷빛으로 짙어 오겠지  

 

소라 빛 맑은 하늘  

타오르는 아지랑이 향연  

파도치는 푸른 보리밭엔  

조잘대는 종달새도 날겠지 

얼음 녹아내리는 도랑 물소리  

생명을 잉태하는 뽀송한 속살 냄새 

가지마다 수액이 차오르고 있다 

곧 벙글어질 고운 꽃밭에서  

탱글탱글 가슴 부푼 처녀들  

짝하여 여백을 채우겠지

서러운 이 봄의 가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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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公許

 

흘러간 날이 한스러워 꽃으로 환생했다

우주도 되우 허전하여 

마알간 초유 햇살로 여백을 채우고 있다

공광(空曠)하여 건드려 본 고요

적막이 점점 난달 같이 미궁이다

시절이 쓸쓸하여 활자를 새겨본 허공

외로움이 노박이로 늪인 것 같다

바람도 사뭇 

나뭇가지에 느즈러지게 주저앉아 한숨뿐이다

그저 

만만하게 넘어가기만 하는 책장

눈 속으로 들어온 먹물마저 흔적 없이 통과 한다

다시 가고 싶다 몽울 졌던 꽃봉오리 안으로 

새록한 머리채가 글 한 줄을 써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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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살한 햇살

 

햇살 한 움큼 휭하니 

코끝을 자극하는 상큼하고 알싸한 흔적

난리법석 떠는 꽃망울 화냥기

되우 범했나 보다

하늘이 민망한지 살품을 파고든다

말간 초유 봄볕은 애젊은 풀 비린내

온통 야시한 향기로 범벅이다

널브러져 앉아 있던 

실바람도 엉덩이를 들썩인다

곰비임비 풀어헤치고 

솟아오르는 아지랑이도 간두러 진다 

부풀어 터진 꽃잎이 

수줍은 듯 배시시 웃는다

햇살과 내통한 목련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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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가림새 없는 알몸으로 

쓸쓸히 서 있는 것을 본다 

 

꽃보라 하얗게 채워질 때

호걸풍 이려는가

여백이 훌걸이 흔들리고 있다

 

자리 마저 잠시 엉긴 사이 

치마 끝에 감춰두었던 꽃빛발

 

기척도 없이 하늘을 열고 오른다

우주의 섭리인가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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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

 

축제의 마지막 시간

보금자리를 찾아서 떠났다

남아있는 냄새가 아리다

출렁이던 쏭강이 빗줄기에 흥건하듯

담겨있던 빈 밥그릇만이

헹궈 내기도 못내 아쉬워

질번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후덥지근하던 열대우림의 우기

온 세상이 내 것인 듯 빠르게 뛰던 맥박

분내를 풍기며 풀어 저치던

가슴 자락 안으로 웅크린다

텅 빈 벽에 붙어 있는 텔레비젼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으로 휘 번득이고

귓불에서 가파르게 상승하던 숨소리

심중을 관통하여

홀로 서 있는 그림자가 아프다

베일에 가려진 존재가 맵다

절해의 깜박이는 등불같이

한도를 사이에 두고 수없이 많은 날을

수도승처럼 수행해야 할 것이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내 눈 속에는

직전의 형상만이 미련하여 얼룩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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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

 

포구 마을 둘레길을 걷다 

삼라만상을 내려놓고 

널브러져 있는 그를 만났다

봄볕에도 지치는지 

허리를 반쯤 펴다 자빠진다

바람이 떠나려면 아직 멀었건만

급살맞을 어부

부러진 발목에 무시무시한 대바늘을 

사정없이 찔러 깁스를 한다

백수 된 지 인재 한 달 남짓하다만 

허기진 옆구리가 찔리고

먹먹한 가슴에 추가 매달린다

그가 파리한 얼굴로

살품에 파고들어 울상이다

국밥 한 그릇을 물 빠진 포구에 쏟아붓고

집으로 향하는 발길에 

수백 킬로그램의 몸둥이가 동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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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해

 

남이섬행 배에 몸을 실었다

잿빛 하늘 안에 

얼굴을 감추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가끔 내밀다 숨어버리기도 하는 

파리한 눈빛이 강물 속에서

찢어지고 깨진다

반나절이 아직 오르지 못한 산 중턱인데

물속을 메아리치는 절규가 

저벅저벅 따라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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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또

 

하루를 지우려니 작은 섬이 

허구의 방황 속에 온통 다 흔들린다

깔창 밑에 낀 

돌 부스러기가 열병을 앓는다

집으로 향하는

전동차가 허청허청 무겁다

서산 너머 있던 그녀가 쿵 하고 떨어진다

심장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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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내내 감아온 

차가운 등껍질 풀어 헤치고 

꼬깃꼬깃 감췄던 날개 죽지 

비릿한 젖몸이 

살품에 안고 내민 산수유

사각거리는 강가 언덕에

아지랑이 몸부림이 시끄럽다

어색한 웃음으로 시간을 탄다

빛 내림이 

겨울의 찌꺼기를 먹어버린

한나절이 소화되는 동안

연노랑 꽃잎이 입을 다문다

고요해서 너무 고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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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발톱이 남아 있는 산책길에 

졸졸 따라나선 너를 보았다

쉬엄쉬엄 오고 있더니만

어느새 두 팔을 벌리고 켜는 기지개 

겨울을 견뎌낸 애섧은 새순이  

가슴 부푼 단내를 오솔길에 내던진다

너는 기다리지 않아도

심장에 징검다리를 놓고 혈관을 흘러

나뭇가지를 물결치게 할 것이다

출렁이는 보리밭엔 하늘길을 만들어 

온갖 새들을 불러들이겠지

그렇게 세상을 채우고 휭하니 사라지겠지

기다림에 지칠 때쯤이면

다시 슬며시 찾아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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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떨어지는 봄볕 뒤에

그분의 

냄새가 숨어 있었나 보다

아주 착한 온기는 

보리꽃이 만발하고

날을 세운 바람 떠난 자리에 

조용히 누워계신다

맑은 연둣빛 생명의

익숙한 숨결 보고 있노라니

전부가 백색의 음성으로 

머리끝을 오간다

흘러내리는 생각이

잊혀가는 그때 그날을

심하게 따뜻한 그늘로 채우고

 

깊숙이 품은 따스한 웃음소리가 

온전한 그의 발걸음이시다

해가 넘어가는 소리도 없는

어둑해진 저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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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출렁이는 징검다리를 건너듯 

하나둘 떠나보낸 나뭇가지

새 생명을 잉태하는 꽃 향이 비릿하다

꽃잎이 줄다름을 치듯 수상하다

바람 속을 무리 지어 달린다

후두둑 

봄비인 듯 꽃비인 듯 

뛰는 심장을 잡아챈다

혈관이 굽이굽이 흘리고 간 발자국은 

새하얗게 오솔길에 휘청이며 

나뒹굴어 이리저리 찢기고 밟힌다

청춘 원 없이 바쳤건만

먹구름이 온몸을 휘감는다

흔적 없이 사라져 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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