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도에 가봤어요? 오동도의 동백나무들은 언제나 나무껍질 위로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아요” 한강 소설 ‘여수의 사랑’ 중

▲ 사진=이주옥

전남 여수는 확연하게 훈풍이 불고 있었다. 이제 봄이 코앞에 와 있구나 싶었다. 남도 끝자락 다도해의 한끝에 조용히 자리 잡은 여수는 인구 28만의 해양도시다. 변함없다는 것이 LTE급 시대에 어떤 의미일지 조금 고민스럽기는 하지만 한결같음으로 해석하면 평화롭고 아늑한 일이다. 여수는 크고 작은 건물들과 아파트들도 대부분 외벽이 하얗다. 파란 바다와 어우러져 상큼하다. 현지인들은 조개 무덤이 가득하고 갯내음만 풍기던 곳이 해양 엑스포를 치르면서 현대식으로 단장됐고 그로 인하여 여수는 산업도시보다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췄다고 뿌듯해했다.

소설가 한강은 소설 ‘여수의 사랑’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여수만(灣)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 것이다’ 또, ‘오동도에 가봤어요? 오동도의 동백나무들은 언제나 나무껍질 위로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도 했다. 그녀가 표현한 여수는 격렬하고 다소 자극적이다. 내가 간직한 여수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감정과 느낌은 같을 수 없기에 또 다른 여수의 모습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 한편으로는, 구분된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 명백해진 것 같아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그곳으로 갔고 내게 여수는 그 기억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의 여수는 소박하고 작은 항구 도시일 뿐이었다. 찝찔하고 비릿한 바다 내음과 허름한 평상 위에 생선이 마르고 있는 작은 집들이, 고정된 스크린처럼 내 기억의 뒤편에 머물러 있었다. 하긴 40년이란 시간이 지났으니 바다는 그 사이 몇 번이나 뒤집어지면서 울었을 것이고 그 배경은 보수되고 덧칠됐을 것이다.

▲ 사진=이주옥

40여 년 만에 찾은 오동도는 단조로운 무채색 수묵화에서 화려한 유채색의 수채화가 돼 있었다. 거친 조개가 점점이 박혀있던 울퉁불퉁한 시멘트 다리를 건너 오동도 입구까지 꽤 멀었던 길에 바다는 여전한 몸짓으로 넘실대고 있었지만 말끔하게 단장된 입구는 새삼 여기가 어딘가 싶었다. 작은 조개 장식 기념품을 샀던 기억을 품고 오르니 말끔한 나무계단이 반겼다. 그때 자그마한 소녀의 키만 했던 동백나무는 이제 둥치가 튼실한 노거수가 되어 흘러버린 세월을 말한다. 조금 이른 탓일까. 봄물을 막 머금기 시작한 동백나무는 아기 손톱만큼 작은 몽우리가 맺히고 있었다. 하지만 햇살을 가득 받은 나무에서는 도저히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꽃송이 몇 개가 이미 몸을 풀기 시작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더이상 겨울은 아니었다.

여수에는 인문학자 김정운 교수가 살고 있다. 그는 허름한 미역창고를 개조해서 미력창고(美力創考)라 이름 붙이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아름다움의 힘으로 창조적인 생각을 한다’는 의미로 바닷가 작업실의 이름을 ‘美力創考(미력창고)’라 지었다. 그가 일간지에 연재한 ‘여수만만’을 읽으면서 여수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움이 됐다. 가수 장범준이 부른 ‘여수 밤바다’를 들으면서 결국 그리움은 열병이 되었다. 장범준은 “여수 밤바다 이 바람에 걸린 알 수 없는 향기가 있어 네게 전해주고프다”고 했다. 그는 정작 여수에 연고가 없다고 한다. 그런 그가 이토록 여수를 사무치게 노래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여수라는 지명이 주는 아련함과 나그네의 진한 향수가 있기 때문이리라.

황혼 무렵의 바다 색깔은 가장 아름답다. 황금빛으로 변한 바다 위에 갈매기들은 미동도 없이 무늬처럼 떠 있다. 한낮의 분주한 날갯짓을 멈추고 돌아갈 누울 곳을 찾는 물상들은 사람이나 새나 모두 애틋하다. 멀리 보이는 배들도 아지랑이처럼 반짝이는 여수는 이미 봄이 물큰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코리아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