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이 무대가 내 인생의 마지막 무대’라는 마음으로 노래
절박함이 만들어 낸 열정의 소산 발현

 

언제나 충만하고 열정적인 에너지를 발현하는 가수 유지나. 87년도에 데뷔했으니 34년 차 가수다. 타고난 열정의 소유자답게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주변인들을 스스로 만들어나갔고 이는 결국 자신을 대중들에게 처음 알리게 된 노래 ‘저 하늘, 별을 찾아’라는 곡을 작곡한 박성훈을 만난 인연까지 이어졌다. 본인은 “인물이 되고 몸매가 좋았다”고 특유의 농담거리로 에둘러 표현하지만, 그 저변에는 판소리로 닦인 탁월한 노래 실력 때문이었으리라.

뛰어난 외모는 분명, 이 시대의 또 다른 경쟁력이다. 유지나는 “그것들을 유지해야 하는 숙명”이라고 위트 넘치는 농담을 했다. 이 또한 30년 넘게 새벽 4시면 산을 오르는 노력의 산물이다. 거기에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줄 안다”는 인생관을 펼친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런 관리야말로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바라보는 대중들에 대한 의무이자 배려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익히 아는 대로 그녀는 판소리로 노래의 세계에 들어섰다. 성창순 선생님의 문하생이었다. 타고난 실력은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했고 이런 실력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워커힐 호텔에서 MC를 보며 게스트로 간간이 민요 ‘꽃타령’이나 ‘까투리타령’을 부르며 무대 경험을 쌓고 관계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이런 행보는 당시 Y기획사에 5천만 원이라는 계약금을 받고 15년 동안 전속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Y기획사에는 김연자, 한규철, 조하문, 우순실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소속돼 있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고 그녀의 전속은 폐기처분 됐다. 당시 팔당대교에서 가판을 펼치고 카세트테이프를 판 일화는 유명하다. 하루 2~300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닥친 상황에 정면 대결하는 당차고 열정적인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트로트 예능 프로그램 TV조선 ‘사랑의 콜센타’에서 본 에너지는 실로 놀라웠다.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보였던 것이 단순히 노래 사랑인지 아니면 제어할 수 없는 천성인지 궁금했다. 이에 그녀의 대답은 “이 무대가 내 인생의 마지막 무대”라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절박함이 만들어 낸 열정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선택할 기회가 온다면 국악과 트로트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에 감정이 북받쳤을까. 시종일관 유쾌하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대중가수로 살아온 이면에 깔린 이러저러한 시련에 만감이 교차했으리라, 실력을 갖추고 외모가 되는 젊은 여가수에게 각종 음해는 고통이었고 결국 시작점을 돌아보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의 시간은 그의 삶에 단단한 기반을 만들었으니 이제는 웃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녀는 인생의 성장에 필요한 주요한 요소에 부모님, 배우자, 주변 사람, 부지런함을 꼽았다. 태생적 선택이야 하늘의 뜻이라 해도 좋은 주변 사람들과 부지런함은 노력이었고 지금의 여유와 성공에 초석이라고 허심탄회하게 밝힌다.

다섯 명의 오빠에 고명딸로 태어나 넘치게 아버지 사랑을 받았다. 그런 아버지가 13살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은 그녀 인생의 가장 큰 상실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아버지와 딸’이라는 듀엣곡을 기획하게 만들었고 국민 MC 송해가 아버지를 대신했다. 데모 테이프를 듣고 눈물로 수락한 송해와 부녀가 된 사연이다. 이런 인연으로 얼마 전에는 ‘아버지의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송해의 시간 15분을 구입해서 딸 노릇 했다.

지금껏 히트곡은 6~7곡 정도이고 이름 없이 사라진 곡들도 많다. 이제 뒤안길에 있는 노래도 다듬어 역주행시키는 노력도 하고 싶단다. 트로트 가수의 범람 시대에 운 좋고 실력 좋은 후배들에 대한 애정도 전하면서, 특히 자신의 노래 ‘미운 사내’를 자신보다 더 맛깔나게 불러준 이찬원을 서슴지 않고 아들이라고 부른다.

유지나에게 언제 어느 때고 말 한마디에 웃고 노래 한 구절에 손뼉 쳐주는 팬들은 그녀의 건강과 하루하루 열정 에너지의 원동력이다. 받은 사랑은 되돌려 줄 때 더 아름답게 발현되는 것일까, 그녀는 모교인 국악예고에 장학금을 기부한다. 특히 그 장학금으로 후배 한 사람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 일은 너무나 보람 있는 일이란다. 마지막 한 학기를 못 마치고 제적당한 대학에 다시 3학년 편입시험을 치러 재입학해 졸업하고 재작년 기어이 석사모까지 쓴 일은 본인의 명예보다는 어머니와 오빠들에게 씌워주고 싶은 효심의 발로였다. 그리고 남은 꿈, 바로 패밀리 하우스 건립이다.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던 만큼 구순을 앞둔 어머니와 오빠들과 한 건물에 살면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싶단다. 이 또한 그녀의 효심과 열정이 있으니 능히 이뤄질 꿈 아니겠는가. 그녀의 행보 앞에서 새삼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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