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위적인 행위도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데칼코마니의 세계
파동으로 만들어진 행간의 반영은 가히 몽환적

▲ 사진=이주옥

천년 고도 경주는 시간이 멈춘 듯하지만 길 한가운데는 신문물들이 빵빵거리며 지나다니고 사람들은 그 문물들을 끌어안고 빠르게 걷는다. 거기에 기죽지 않고 도심 가운데 우뚝 솟은 고분들은 제 자리가 애매해도 역정 한번 내지 않는다. 신라의 후예들답게 말없이 견디고 바라봐준다. 어느 시절 한 세상을 호령하던 서릿발 같은 기상쯤 문명이 뺏어갔어도, 거리거리에 기와 몇 장으로 옛 신라의 명성을 겨우 붙들고 있어도 야박한 세상을 탓하지 않는다.

황리단길이라 이름 붙인 어수선한 거리에는 짝지어 걷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이다. 여기저기 국적 애매하게 꾸며놓고 손님을 부르는 카페에서 사람들은 여유롭게 담소 중이다. 그 거리를 뒤로하고 초저녁에 찾아 든 동궁과 월지(東宮과 月池). 몇 년 전 여름에 찾아간 그 입구의 연꽃은 연못 속으로 침잠한 지 오래, 이제 그 뿌리는 태초의 흙으로 돌아가 또 싹을 틔우고 있으리라.

경주 동궁과 월지는 경주시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 터다. 예전엔 안압지로 불렸었는데, 왕실에서 연회를 베풀던 연못에 달이 빠졌다 하여 2011년에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변경됐다고 한다. 애초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文武王) 14년(674년)에 황룡사 서남쪽 372m 지점에 조성됐다. 큰 연못 가운데 3개의 섬을 배치하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무산(巫山)을 나타내는 12개 봉우리로 구성된 산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선 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섬과 봉우리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의 원지(苑池)라고 하니 노란 불빛 어린 연못이 새삼 더 신비롭기만 하다. 이것만 봐도 우리 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간직한 곳이 신라가 아닐까 싶다.

월지는 왕궁에 딸린 연못으로 서쪽에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동쪽과 북쪽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룬다. 연못 안에는 3개의 성(섬)이 있다. 별궁인 임해전과 여러 부속 건물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옛 고도의 영화를 느끼기 위해 찾는 관광객들로 다시 새로운 멋을 품는다.

동궁과 월지는 무엇보다 야경이 제맛이다. 연못에 비치는 건물의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반영은 환상이다. 동궁과 월지의 관람 동선은 입구를 등지고 주로 건물과 연못을 따라 왼쪽으로 돈다. 처음엔 건물이 하나 보이고 조금 더 걸으면 두 개째 보인다. 이렇게 입구에서 정반대 편까지 천천히 걷다 보면 세 개의 건물들이 모두 보이는 장소가 나타나는데 한 장의 사진을 남기기 위해 줄을 서는 수고도 행복할 수 있는 장관이 펼쳐진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그림자를 남긴다. 그림자가 곧 그것들의 원본이다. 여기 월지에 비치는 동궁의 아름다운 그림자를 보며 찬란한 신라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 자리한 주인들의 감성까지도 온전히 담겨있음을 알 수 있겠다.

사람들은 옛 궁터를 걸으며 고요 속에 오롯이 침투한다. 시간이 갈수록, 어둠이 깊어갈수록 물 위의 반영은 화려해진다. 붓칠 한 번 하지 않고도 완벽하게 채색되는 자연의 오묘한 그림, 검은 도화지 위에 금색 테두리를 한 연못이 만들어 낸 동궁의 반영은 한 번씩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더 아름다운 색으로 번진다. 어떤 인위적인 행위가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데칼코마니의 세계, 바람의 파동으로 만들어진 행간의 모습은 가히 몽환적이다. 아직 색을 품고 있는 단풍나무가 뱉어내는 달달한 호흡과 사람들이 토해내는 행복한 숨결이 합쳐 이루는 아름다운 반영은 찬란한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닮았다.

낮보다 밤이 아름다운 곳이 몇 군데 있다. 서울의 한강변이 그렇고 신라의 달밤이 그렇다. 숨어들거나 감춰져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까만 밤에 채색되는 불빛들의 화려한 향연 때문이리라. 달빛을 끌어안고 조용히 걷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경주의 밤은 더욱 아름답고 동궁을 품어 안은 월지의 밤도 달빛과 불빛이 있기에 더 아늑하고 찬란하다. 그사이에 잔잔하게 투영된 아름다운 달빛이 연주하는 야상곡이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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