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지며 색을 풀어 놓는 황혼의 따스함, 섞이면서 충만하게 하나가 되는 곳
지는 노을만 품어도 아쉬울 것 없는 와온해변

▲ 사진=변경운

전남 순천시 와온해변으로 가는 길가 억새는 유난히 하얀 빛깔이었다. 자동차 속도를 한껏 늦춰도 눈치 보이지 않을 만큼 한적한 시골길, 두어 뼘쯤 남은 11월의 햇살은 맘껏 눈부시고 해지는 순천만은 고즈넉하다. 기다란 데크로 된 산책로에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격렬함을 멈추고 잔 숨 쉬는 물결의 회색 바다에 주홍 물감을 붓에 잔뜩 묻힌 채 채색할 준비를 하는 노을이 비장하게 출사표를 던지고 있었다. 나그네는 한낮의 햇살에 그을린 목조건물 커피숍에서 꼭 그 햇살만큼의 따스함이 담긴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사라짐이 남기고 갈 장엄한 채색의 향연을 기다린다. 창밖의 늦은 햇살이 찬란하게 커피잔 속으로 투영된다. 커피도, 가슴도 더 뜨거워진다.

강렬한 햇살을 못 이겨 커튼으로 반쯤 가려놓은 실내. 커튼 아래로 머리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려 넘어가는 햇덩이를 향해 기어이 정면 대결 해본다. 먼발치서 손을 모으고 서 있던 커피집 청년이 슬그머니 다가와 커튼을 올려준다. 마치 연주회 서곡이 울리며 오프닝 커튼이 올라가는 듯해 가슴이 뛴다. 저 멀리 뉘엿 기울어지는 해처럼 조금 아득하지만 따뜻한 호의가 느껴져서 청년을 바라보며 눈으로 웃었다. 순천만의 물결은 한번 둘렀다 풀어 놓은 청회색 스카프처럼 약간의 구김만 있을 뿐 더없이 잔잔하다. 정박해 놓은 어선 한 척도 움직임이 없다. 그곳은 바다가 아니고 11월의 바람이 그려 놓은 한 폭의 그림일까.

사람들은 적당히 손과 입술만 움직여 커피를 마셨다. 그 사이 실내에는 사분사분한 바람처럼 제목도 모르는 노래만 흘러 다니고 있다. 저물녘 해는 맞장 뜨려는 서부의 총잡이처럼 바닷물과 장엄하게 대치하며 조우를 기다리고 있다. 숨죽인 조율과 합일의 시간. 회색 가을 바다가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황량하게 비어 있던 갯벌도 서서히 만조가 된다.

▲ 사진=변경운

해와 바다가 맞닿으려는 순간 바다를 향해 급히 걸어 나갔다. 검붉은 햇무리가 너무도 찬란해서 결국 사람이 실루엣이 된다. 사람들은 자연에게 흔쾌하게 주인공 자리를 물려주며 더없이 겸손해진다. 일정한 간격으로 한 겹씩 접어지며 금빛 물결이 개펄을 채운다. 무엇인가 밀려온다는 두려움보다는 비어 있던 것을 채운다는 충만함이다. 그때 수면 아래로 꿀렁거리는 물결이 움직인다. 안에서 황혼에 취해 있던 무엇 하나가 서둘러 제집을 찾아 돌아가는 모양이다. 아니 망둑어처럼 뛰던 개펄 아낙의 노곤한 하루의 생계가 노을 속으로 잦아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람결은 조금 쌀쌀했지만 해를 품은 바다에선 훈기가 느껴졌다. 그 때문인가. 문득 저만치 앉아있는 낯선 이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도 그저 넉넉하게 하루의 노곤함을 받아줄 것 같다.

바다 위로 서서히 주황 물이 번진다. 바닷물과 섞이며 주황빛은 연한 금빛으로 변해갔다. 그 사이 바다는 일정한 간격으로 한 겹씩 접혀지면서 점점 더 속도를 내더니 비어 있던 나머지 갯벌을 금세 채운다. 붉은 햇물 묻은 구름 한 점 걷을 수 없다. 금빛으로 물든 바닷물 한 줌도 담을 수 없다. 아무 말 없이 앉아 노을과 바다의 합체를 바라보던 사람들도 그 순간엔 조용히 섞여 11월의 따뜻한 황혼이 되리라.

모든 것은 사라짐으로써 온전히 그곳에 남는다. 떠나갔다가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들은 소중하다. 밀려오는 물결이 그렇고 지는 해가 그렇다. 다시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나간 사람조차도 그때만큼은 자연의 섭리라 여기고 싶다. 그저 바라만 보다 남겨두고 올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석양을 안고 한 겹씩 접혀지던 물결의 향연을 굳이 스산한 11월 속에 섞을 필요는 없으리라. 다만 스러지며 색을 풀어 놓는 황혼의 따스함만 느끼면 되는 것. 섞이면서 충만하게 하나가 되는 곳, 언제나 지는 노을만 품어도 아쉬울 것 없는 그곳, 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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