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류재복 대기자

TV가 일반에게 보급됐던 초반,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김일의 박치기 한방에 떠나갈 듯 함성을 질렀고 홍수환의 주먹 하나에 한낮 뙤약볕 아래서 논 매고 밭 갈던 노고를 잊었다. 이즈음도 마찬가지다. 그날이 그날인 소시민의 신산한 삶은 축구선수가 넣은 한 개의 골인에 살만 한 세상이 되기도 하고 골프세계대회 우승 선수의 몸값에 괜히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이것이 스포츠가 주는 희망이고 즐거움이다.

50여년 가까이 대한민국의 스포츠계에 확실한 존재감을 지니고 자타공인 ‘스포츠에 살고 스포츠에 죽는’ 사람이 있다. 국내외 경기 때마다 매스컴 안팎에서 선수와 국민들을 잇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했던 최동철 전 스포츠 앵커. 그를 만나 스포츠에 대한 신념과 열정을 들었다.

칠순의 나이가 상상이 되지 않는 그는 여전히 ‘젊은 그대’였다. 마침 불기 시작한 선선한 가을바람을 데리고 불쑥 들어선 그에게는 벌써 남다른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특별히 형식에 제약받지 않는 입담은 그의 자유롭고 밝은 성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시종일관 아련한 추억 속의 스포츠 인물들을 적절하게 소환하며 50년 저장 된 추억들을 풀어놓았다.

솔직히 예전의 우리나라 스포츠는 손기정의 마라톤을 시작으로 임춘애 선수까지 언제나 배고픔 뒤에 무겁게 깔려 있거나 아니면 힘없는 나라의 소극적인 역사의식으로 발현될 때가 많았다.

이런 과정에 최 앵커는 스포츠를 일상의 즐거움으로 인식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강원도 춘천출신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고등고시를 준비하던 중에 해병대 입대했고 그곳에서 인생은인 1호 정채호 정훈참모를 만난다. 그의 남다른 목소리를 알아보고 생각지도 못한 방송직을 권유했다고 한다. 포항 해병대 복무시절 방송경험이 주어졌고 그 일이 계기가 된 동아방송 입사는 TBC 7기 아나운서로 이어졌다.

이후 언론사 통폐합으로 KBS로 옮기기까지의 여정에 스포츠는 그의 인생의 방점이었다. 그 당시에는 다소 생경했을 스포츠 방송을 선택한 것도 아마 운명이라는 단어에 부합한 일이었으리라. 1973년 KBS 체육부 스포츠국에 자원하여 스포츠를 FM(FM대행진)에 접목시켜 청취율 30%를 기록한 일은 스포츠가 우리 생활 속으로 밀접하게 들어 온 단초가 됐다.

사람은 나이 들수록 대부분 추억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가 기록한 스포츠 일화 면면은 최 앵커가 지금을 사는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KBS 재직시절은 그의 방송인생의 르네상스나 다름없다. 당시 그를 인정해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은 이원홍 사장은 또한 은인이다. 남다른 인복의 옷 위에 열정이 덧입혀져 스포츠 방송 역사의 한 자리에 최동철이라는 이름이 확실하게 새겨졌으리라.

그에게 스포츠 앵커에 대한 신념을 묻자 단숨에 “3초를 잡아라”고 대답한다. 이어 “브라운관이라는 기계 속에서 화면 밖 시청자를 흡수할 수 있는 힘은 무엇보다도 감성”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즉 휴머니즘이 없는 방송은 시청자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는 2000년도에 프리선언을 한 뒤 현재 춘천MBC를 비롯하여 8개의 방송활동을 하고 있다. 주로 경기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스포츠 일화를 전한다. 그는 그와 인연이 닿았던 스포츠선수들에 관한 날짜나 기록을 소수점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특별함을 지니고 있었다. 올림픽이나 각종 경기에 대한 기록은 물론, 작은 경기조차 거의 데이터화 된 암기력을 자랑함으로써 혀를 내두르게 했다. 이는 곧 자신의 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의 다른 이름 아니겠는가. 단 세 번을 만나고 결혼한 아내, 그리고 자신의 일을 똑 부러지게 하고 있는 1남1녀도 그의 열정의 소산이다. 아내와 자녀 얘기에서는 그도 역시 평범한 남편과 아버지의 면모를 보였다.

최 앵커는 1시간 여 가까운 인터뷰에도 지치지 않고 처음의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다소 식상한 질문이라 여기면서도 초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을 물었다. “매일 빠짐없이 두 시간씩 하는 운동과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스트레스 없는 즐거운 일상이 비결”이라고 대답한다.

인터뷰 마무리에 앞으로의 꿈을 묻자 주저 없이 “방송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수명 120세에 제2의 전성시대를 꿈꾸는 것은 지니고 있는 젊음을 과시하고 싶다는 다른 말일 것이다. 공영방송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스포츠앵커로서의 명성을 얻고 싶은 것, 그러면 충분히 꿀 만하고 실현 가능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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