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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리어, WAR:EAR 6.25 참전용사를 만나다
류재복 기자  |  yjb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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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25  23:2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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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리어, WAR:EAR 6.25 참전용사를 만나다

   
 

[코리아데일리=류재복 대기자] WAR:EAR는 주얼리 브랜드로서, 참전용사 생활고 개선과 인식 개선을 위한 사회적 기업을 준비하고 있다. WAR:EAR는 지난  5월 21일  이준린, 이혜인, 조우인, 황혜지 공동으로 6.25 참전유공자 원주지회 지회장 최동식을 인터뷰했다.

이날 최동식 참전용사는 "다가오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현대인들이 잊지 않고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라며 말을 전했다.

최동식 지회장은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여했으며, 학도병으로 활동하면서 겪은 몇 가지 사건에 대해 말했다. 대대장님이 눈에 포탄을 맞게 되어 실명한 사건, 인민군 사수를 잡았는데 이남 사람이었던 사건 등 전쟁의 참혹함을 말했다. 이를 바탕으로, WAR:EAR는 현대인들이 참전용사를 더 기억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은 목걸이 사업의 필요성을 알렸다.

WAR:EAR는 참전유공자를 위한 군번줄 목걸이를 판매하고, 그 수익금으로 포토북을 제작하여 그것을 통한 인식 개선 캠페인을 진행하려는 계획 중에 있다고 밝혔다.

충청도 홍성군에서 출생한 최동식회장은 올해 호적상 87세다. 일제 강점기에 학교를 다녔으며, 중학교 때 6.25 전쟁 발발함에 따라 피난길을 갔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학도병에 16세의 나이로 지원했다. 최동식 회장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6.25 전쟁의 서막-

6월 25일 북한군의 침입으로 남한은 대구만 남은 상황. 대구를 뺏기면 우리는 부산 앞바다로 들어갔었고, 백산엽 장군이 후퇴하지 말고 죽어도 여기서 죽자. 소변을 봐도 그쪽을 보면서 소변을 봐라. 그렇게 싸워 맞서며 북진을 했고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에 의해 내려오게 되었음.

 

-기억에 남는 전투-

1) 훈련 한 달을 받고 다부동 유학산 전투를 총 없이 학도병을 앞세우고 뒤에서는 군인들이 오면서, 학도병은 산을 올라감. 총을 쏘면 학생들이 달려나가서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감. 죽은 시체를 밟고 군인들이 와서 땅을 뺏어 올라가면 북한군이 실탄이 떨어질 때 되면 후퇴를 했을 때, 사수의 발을 묶어 말뚝을 박고 쇠사슬로 묶어 놓고 도망을 못가고 우리 쪽만 보면 총을 쏘게 만들어놓았음. 학도병이 산을 기어 올라가는데, 조정해서 못 쏘고 그대로 묶인 채로 총을 쏨. 그러다가 그 사수를 잡았는데, 서울 출신의 이남 사람이 인민군에 잡혔고, 그대로 인민군 소속의 군인으로서 전투를 벌인 것. 같은 이남 사람끼리도 싸우는 참혹한 전쟁이었음.

2) 오성산에서 대대장이 어린 나에게 무전병을 시켰음. 그 날 밤 인민군이 공격을 했고 무전을 받음. 대대장은 호랑이 1이라 하고, 중대장은 독수리 1이라고 하여 “지금 포탄이 터져 독수리 1 독수리 2 사망” 이런 식으로 보고를 함. 무전으로 누가 부상을 당했고 사망했는지 보고를 함. 대대장이 6중대가 절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호에서 나가려고 나에게 철모를 달라고 했고, 내가 철모를 건네주고 대대장님이 철모를 받아 쓰는 순간 대대장 주위에 포탄이 떨어지면서 눈이 실명됨. 그 밤에 병원을 가지 못하고 밤새 수통에 물을 꺼내다가 아침에 병원으로 가도록 모심. 대대장을 대전육군병원으로 보냈던 것이 아주 기억에 남음. “중령 김두업” 사건

 

-기억에 남는 장면-

가장 나이가 어리고 계급이 없으니 학도병은 쫄병으로 보초를 서는 역할을 했음. 전방에서 죽은 시신이 들어오는데, 이러한 시신을 창고에 넣고, 보초를 서야 했음. 전쟁 중 사망한 것은 쥐가 파먹기도 하고 인민군이 목을 잘라오기 때문에 시신을 뺏기면 안 되기 때문에 보초를 서고 있었음. 쥐가 건빵을 주머니에 놓고 먹어가면서 전쟁을 했는데, 쥐가 주머니에 와서 건빵을 부스럭거리며 먹고 있었음. 아직도 꿈에 나오는 장면.

 

-참전 계기-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으니, 참전을 안 할 수가 없었음. 나이가 어려 안 받아주는데도 위기에 처했으니 학도병으로 들어가서 참전을 해달라고 해서 들어가게 되었음.

 

-학도병에 대하여-

1) 학도병은 피난을 가다가 지원을 했기 때문에 이름을 적거나 하는 신원조사는 거의 안함. 인원수만 맞춰 바로 보냄. 학도병 몇 명 죽은 지만 대강 세는 정도.

2) 국립묘지 동작동에 “무명용사”= 학도병

그 이유는, 당시 함께 피난하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잃고 피난 길에 피난하다가 사망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중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대부분의 신원도 모른 채 전쟁으로 사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을 곧 무명용사라는 칭호로 국립묘지에 잠들게 되었음.

 

-참전용사가 겪었던 추위-

다리 겨울 되면 지금도 가려움. 가려우니까 긁어도 시원하지 않음. 그 당시에는 신발을 못벗었음. 그 당시에 보급되었던 방안화를 신어도 낮에 눈으로 인해 신발이 얼어붙었고 그대로 시려운 채로 신게 됨. 털모자 솜으로 된 것으로 얼굴을 뒤 덮어쓰고 밤을 새움. 물자가 보급될 때 밥도 배식받았는데 그 음식을 짊어지고 갔어야 했음. 음식을 받을 때 국이 넘쳐 쏟아지면서 얼 때도 있었음. 밥을 먹을 때도 숟가락이 얼어붙어 먹기 어려웠을 때가 있었음

 

-참전용사가 느끼는 현대인들의 시선-

6.25가 70년이 되어도 6.25가 사회에서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함. 그게 참 서운한 마음이 듦. 625가 있어서 지금 이렇게 평화롭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고 생각함.

 

-전쟁 후 군입대를 하게 된 계기-

80년 10월 말. 학도병으로 지원을 해서 전쟁을 치렀지만 현역으로 새로 지원을 함.

학도병은 6.25가 끝남과 동시에 자동 해산이 되었고, 귀가를 시켰음. 학도병으로서의 전쟁 후 훈장이나 군번을 받지 못하고 영장이 나와서 정식으로 군입대를 함. 전쟁을 치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장을 받았고 정식 군인으로 복무도 했음.

 

-전쟁이란?-

전쟁, 전쟁은 뛰어들어서 직접 겪어야 전쟁임. 말로만 들으면 전쟁을 절대 알 수가 없지.

전쟁에 뛰어들어갈 때, 싸워 이기자는 각오만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임.

 

-현대인들에게 바라는 점-

6.25 참전용사분들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음. 6.25 전쟁을 좀 더 공부하고 알 수 있었음 좋겠다. 관심을 가지고 기억해달라고 하심.

 

-WAR:EAR 사업에 관하여-

인식표는 홈이 파져 있는데, 전쟁을 하다가 죽으면 이빨에 끼워서 자신의 죽음을 알렸음. 본인이 희생되었을 때를 대비해 자신의 신원을 밝히는 용도.

-포토북을 발간하여 참전용사분들을 소개하고 현대인들이 참전용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 인식 개선을 돕는 캠페인을 진행하고자 하려고 하는데, 이에 “긍정적이다.”라고 답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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