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터 등 외신은 5일(현지시간) 커크 더글라스가 10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보도

[코리아데일리 이규희 기자]

커크 더글러스의 죽음을 두고 미국에서는 산에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앞서 고인의 아들이자 역시 할리우드 배우인 마이클 더글러스(76)도 이날 페이스북 성명을 통해 부친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구체적 사인은 공개되지 않아 죽을을 둘러 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커크 더글러스는 1916년 미국 뉴욕에서 가난한 유대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커크 더글러스는 1946년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으로 데뷔했다.

 

그는 1949년 영화 ‘챔피언’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후 ‘열정의 랩소디’ ‘해저 2만리’ ‘OK 목장의 결투’ ‘스파르타쿠스’ 등 영화에 출연했다.

약 70년간 활동하며 90개가 넘는 영화에 출연한 커크 더글러스는 1991년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1999년 미국영화배우조합(SAG)에서 각각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특히 1996년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들 마이클이 시상자로 나선 가운데 명예상을 받았다.

고인의 생애는 제정 러시아(현 벨로루시 고멜) 유대계 미국인 이민자인 다니엘로비치 부부의 아들로, "이수르 다니엘로비치"라는 이름을 가지고 미국 암스테르담(뉴욕)에서 태어났다. 먼저 이민을 간 형제가 신원 보증인이 되어 부부는 미국으로 이주를 했다. 그 형제가 사용하고 있던 "뎀스키"라는 성을 본받아 사용했는데, 커크도 "이지 뎀스키"라는 이름으로 자랐고,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에 들어가면서 현재의 이름인 커크 더글러스로 개명한다.

빈민가에 살면서 생계를 위해, 어린 시절 신문 배달부터 노점상, 정원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학업에 힘썼다. 학비 대출을 이용하여 세인트 로렌스 대학교로 진학하여, 학비를 벌기 위해 정원사, 경비원 등으로 일을 했다. 그는 뛰어난 레슬링 선수였으며, 사육제 때는 돈을 벌기 위해 여름 동안 레슬링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꿈은 연기자가 되는 것이라고 새삼 인식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아메리칸 아카데미 오브 드라마틱 아츠에 입학하여, 그 재능을 꽃피워 특별 장학생이 되었다. 이때 클래스메이트였던 로렌 바콜은 이후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1년 징병되어, 그대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군에 종군했다가, 1944년에 부상 때문에 제대했다.

1941년 졸업 공연으로 진행된 《봄이여 다시》(Spring Again)에서 노래하는 메신저 소년을 연기하며 브로드웨이에 데뷔했다. 제대 후 뉴욕에서 라디오를 중심으로 하는 일에 종사하고 무대에도 출연했지만, 로렌 바콜의 추천으로 1946년 영화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The Strange Love of Martha Ivers)로 영화에 데뷔했다. 이것이 전환점이 되어,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에서 안드레이 역으로 출연했고, 더글러스는 무대를 할리우드로 옮겨 활약한다. 이후 강한 이미지를 남긴 여덟 번째 출연작 《챔피언》 이후로, 처음에는 내성적인 성격 배우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전사》는 아카데미상 편집상과 골든글로브 촬영상을 수상했고, 커크 본인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그리고 서부 영화 《죽음의 모래》(Along the Great Divide)'에 출연해 일약 스타덤에 등극했다.

그 후 1955년,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독립 프로덕션 '브라이나 컴퍼니'을 세웠고, 1960년, 자신이 주연하고, 제작, 총지휘를 맡아 제작비 1,200만 달러의 대작 《스파르타쿠스》를 만들었다. 이때 감독을 맡았던 스탠리 큐브릭을 두고 "스탠리 큐브릭은 능력있는 씹새끼(Stanley Kubrick is a talented Shit)"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진지한 역할이 어울리는 이미지 외에, 《해저 2만리》에서 보여준 가벼운 연기와 창세기의 TV 프로그램 《잭 베니 프로그램》으로 뮤지컬 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1973년, 서부 영화 《내일없는 추격》에서 메가폰 역으로 주연을 맡았지만, 서부극 자체가 쇠퇴기에 있었기 때문에 큰 평가를 받지 못했다. 또한 같은 해 TV 뮤지컬 판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작곡 : 라이오넬 바트)에 주연을 했다.

1943년 11월 2일, 아메리칸 아카데미 오브 드라마틱 아츠에서 만난 동창 여배우 다이애나 딜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배우 마이클 더글러스, 차남은 영화 《코카인 블루스》 등의 프로듀서 조얼 더글러스이다. 다이애나는 1951년 이혼 후 배우 활동을 계속하였고, 《벤 케이시》와 《플리퍼》 등의 TV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다.

1954년 5월 29일, 커크는 앤 바이든스와 결혼하여 다시 두 아들을 낳았다. 영화 프로듀서 피터 빈센트 더글러스와, TV 드라마 시리즈로 활약한 배우 에릭 더글러스를 낳았다. 하지만 에릭은 약물 과량 섭취에 의한 입원이나 비행기 내에서 분쟁에 의한 체포를 ​​반복하다, 2004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1991년, 헬기 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유대주의에 대한 사색이 심화되었다. 1996년, 뇌졸중을 앓으면서 언어 장애가 남아 있었지만, 2006년에도 종종 파티에 참석하여 건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4년 2월, 가끔 아들 마이클 더글라스랑 같이 부자들끼리 외식을 한다. 참고로 이때 아들의 나이는 70세.

2011년, 제 8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시상자로 나온 바 있다.

2014년 12월 2일, 누군가가 사망보고서를 실수로 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비운의 스타는 2020년 2월 6일 (현지날짜 2월 5일), 103세의 나이로 사망해 전 세계 영화인들의 추모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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