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백 들고 구내식당 줄서며 밥 먹는 '그분'자녀들


[코리아데일리=홍이숙기자]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의 장녀 서민정(29) 씨는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의 뷰티영업전략팀에서 일한다. 직급은 ‘프로페셔널’로 과장급 팀원이다. 2017년 1월 평사원으로 입사해 오산공장에서 근무하다 중국 유학을 마친 뒤 지난해 10월 재입사했다.

재입사 당시엔 과도한 관심을 우려해 직원들에게 ‘불필요하게 (뷰티영업전략팀) 부서에 가지 말라’는 구두 권고설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관심은 잦아들었다. 익명을 요구한 이 회사 직원은 “처음엔 젊은 직원들 중심으로 그를 ‘셀럽’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고, ‘어떤 옷을 입었네’, ‘어떤 브랜드 가방을 들었네’ 등이 회자하곤 했지만, 이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전했다.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의 장녀 서민정

 
서 씨처럼 ‘평사원’으로 입사해 회사 생활을 시작하는 오너 3ㆍ4세들이 늘고 있다. 일반 직원 입장에선 ‘내 옆자리에 오너 일가가 앉아있는’ 셈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도 과거와는 조금 달라지고 있다.

과거엔 시작부터 달랐다. 19일 각 그룹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001년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은 1995년 전략기획실 이사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1991년 SK상사 경영기획실 부장으로 입사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1995년 전략기획실 이사),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1997년 전략본부 부장) 등도 비슷하다. 
 
하지만 2000년대 중ㆍ후반 이후 입사한 오너가 자녀들은 비교적 낮은 직급에서 시작한다. 구광모 ㈜LG 대표(대리),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대리), 이경후 CJ ENM 상무(대리), 이선호 CJ 제일제당 부장(사원), 허윤홍 GS건설 사장(사원) 등이 그랬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오너 경영인들이 갑자기 자녀에게 승계하는 일도 줄었다”면서 “오너들이 자녀를 성장 주축으로 밀고 있는 계열사로 배치해 낮은 직급부터 경험시켜 능력 면에서 후계자로서 정당성을 갖도록 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낮은 직급에서 조직 생활을 시작하는 ‘리틀 오너’들은 대개 소탈하고 겸손하다는 평을 듣는다. 또래의 2030 세대 직원들이 공정성 이슈에 민감한 데다, 사회적으로도 기업에 사회적 책임과 상생을 요구하는 분위기라 ‘겸손한 경영자’의 모습을 보이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장녀인 이경후 CJ ENM 상무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장녀인 이경후(35) 상무와 함께 CJ ENM 상암 사옥에 근무 중인 한 직원은 “한 번은 커피를 사려고 1층 투썸플레이스(커피전문점)에 줄을 서 있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이 상무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또 다른 ENM 직원은 “부장급 정도가 아니면 이 상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태반”이라며 “오너보다 당장 자기가 섭외할 연예인이나 기획사 사람이 직원들에겐 더 중요하다”며 말했다.

 

최태원 SK그룹회장  장녀 윤정씨

SK바이오팜에서 근무했던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큰 딸 최윤정(31) 씨는 2년여의 재직 기간 중 거의 매일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고 한다. 일반 직원과의 회식에도 빠진 적이 없고 차도 직접 몰고 다녔다. 이 회사 직원은 “(최 씨가) '서민 코스프레'를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하는 모습은 좋아 보였다”고 회상했다. 최 씨는 현재 미국 유학 중이다. 
 
스타트업 창업지원센터인 ‘마루180’에서 일하는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녀인 정남이(37) 씨도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자신이 운전하는 베라크루즈 차에 직원들을 태워 나르는 건 기본. 직원들 역시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이는 종신고용이 무너진 현재 세태가 일정 부분 반영된 영향도 있다. 이경묵 교수는 “더는 종신고용이나 평생직장이 적용되는 시대가 아니다”라며 “더 좋은 조건이라면 다른 회사로 얼마든지 옮겨갈 생각이 있는 젊은 직원들은 회사에 로열티도 높지 않고 ‘리틀 오너’라고 충성하거나 줄을 설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보다 권위 의식은 줄었다 해도 오너 자녀들은 여전히 입시로 치면 ‘특례생’들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상위 30대 그룹 중 오너 일가의 자녀 세대가 경영에 참여 중인 21개 그룹을 조사한 결과 오너 3ㆍ4세대는 평균 입사 4년 6개월 만에 임원을 달았다. 일반 대기업 직원들이 임원이 되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평균 24년인 것을 고려하면 5배 이상 빠르다. 
 
분통을 터뜨릴 만도 하지만 젊은 직원들의 반응은 ‘회사만 잘 되면 상관없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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