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도 아프다--(좋은 글 감상)

글쓴이 -궁금이

 

[코리아데일리=홍이숙기자] 여기서 아프다 함은 의학적이나 물리적인 아픔이 아니고 정신적인 아픔을 말한다. 어릴 때 아버지는 항상 산처럼 든든하고 어머니는 늘 모성애로 강력했다. 학생 때 선생님은 시험을 치지 않아도 되고 모를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형편이 어려울 때 부자들을 보면 아무런 고민도 없이 살아갈 것 같다. 그러나 누구든 다 한두개의 아픔은 갖고 산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던데 이 논리 대로면 사람은 항상 청춘이다. 아픔은 크게 작게 한 사람의 전반 생에 관통되는 필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아픔이란 어느 한 단계에만 존재하고 일정 시간이 되면 다시 오지 않는 그런 유효기를 가진 감정이 아니다. 이 아픔을 넘기면 저 아픔이 다가오고 저 아픔이 해소되면 또다시 다른 아픔이 기다린다. 이렇게 아픔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과정이 곧 살아가는 과정이다. 다만 사람마다 겪게 되는 아픔의 경중과 감당할 수 있는 한계, 해소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를 뿐이다.

나는 어릴 때 예방접종을 하는 게 그렇게 싫었다. 주사기속에 시퍼런 액체가 들어있고 그 액체가 팔로 들어가는 과정이  아프고 무서웠다. 그래서 저 멀리  도망가고 그러면 엄마가 쫓아와서 얼리고닥치고 억지로 데려다 맞혔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언제면 어른들처럼 주사기가 두렵지 않은 날이 올가.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주사는 애들만 아파하는 물건이 아니였다. 지금도 건강검진에서 피를 뽑을 때 보면 두 눈을 꼭 감고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어른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고는 2-3분만 누르고 있어도 될 약솜을 반시간이고 한시간이고 누르고 다른 검사를 다닌다. 솜을 떼는 순간 피가 줄줄 쏟아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 앞에서는 아픈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게 대부분 어른들의 생각이다. 나는 종종 어른들이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보다 훨씬 성숙되였던데 왜 나는 그렇지 못할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학교에 금방 왔을 때 높게 보였던 선생들이셨고 내가 갓 입사했을 때 많이 어른으로 보였던 선배님들이셨는데 내가 그 나이 되고 보니 나는 왠지 전에 내가 생각했던 그런 어른이 아니였다. 그렇다면 지금 후배들의 눈에도 전에 내가 선배들을 바라봤던 것처럼 똑같은 그런 노련함(년로함)과 성숙함(이질감)이 느껴지는 걸가. 알 길이 없지만 대략 세월은 비슷한 사람들의 유사한 생각으로 반복되지 않을가 싶다.

센 척은 어른들의 보편적인 무기이다. 어릴 때는 그게 부러워서 세게 보이려고 담배도 꼬나물고 술도 마시며 어른들이 하는 일을 때아니게 빨리 닮아가려고 애쓴다. 담배가 처음부터 맛있고 술이 처음부터 달아서 마시는 애들은 아무도 없다. 그냥 어른들만의 특권이 신기하고 부럽기도 하여 나도 저런 어른들만의 세계에 한번쯤 발을 들여놓고 싶어서 한대두대 한잔주잔 하다보면 어느새 진짜 어른이 돼 있다. 그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좋은 물건은 아니였다. 그런데 그걸 깨우쳤을 때는 이미 한참을 와 있었고 이제 다시는 호기심이 자제력을 이기는 그런 나이가 아니다.

사람은 신체의 물리적인 쇠퇴에 비해 정신적인 노화는 훨씬 굼뜨다. 한편으로는 어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른”으로 분류되면 섭섭한 게 대부분 어른들의 정신세계이다. 어른의 체면은 세워야 겠고 그런데 마음은 처마밑에 달아놓은 파처럼 봄만 되면 또 파랗게 살아나고, 이런 모순 속에서 우리는 한세대한세대를 살아간다. 체면과 속마음에 대한 두가지 판단이 서로 배척하면 그 자체가 모순이고 아픔이다.

그래서 어른도 아프다. 오히려 더 아플지도 모른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그게 어른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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