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선족무용가의 꿈 이야기

중국조선민족 무용가 초혜씨

[코리아데일리=홍이숙기자] 아마도 중국에서 세식구 모두가 조선민족무용사업에 종사하는건 초혜씨 가족이 유일할 것이다.  아버지는 중국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교수였고 어머니는 연길군중예술관 무용교수였다. 하지만 특수환경으로 어쩔수 없이 무용수의 길을 택했던 아버지는 무남독녀 외동딸인 초혜씨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하여 운좋게 예술가정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전폭적인 지지는 커녕 심한 반대를 받으며 어렵게 무용수의 길을 걸어온 일인이기도 하다.

연변예술학교 학생시절 (좌4번째)
풍부한 예술기교가 돋보이는 무용"타향의 나"
 

아버지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 너무 힘들었기에 딸이 춤 추기를 원하지 않았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무용에 첫눈을 뜨기 시작한 건 초혜씨가 우연히 아버지가 근무하는 가문단에 갔다가 무용수들의 화려한 춤동작에 반하고 부터였다. 초혜씨는 그날이후로 매일이다싶이 춤추고 싶다고  아버지 설득에 나섰다.

 

13살이 되던해, 평양으로 유학갔던 아버지를 마중하러 북경에 갔던 초혜씨는 아버지와 함께 북경무용학원을 둘러 보았다.  딸을 위해 아버지는 미리 친구에게 어려운 부탁을 해 북경무용학원을 견학할수 있게 해주셨다.  아버지가 조금은 마음의 문을 열고 계신 것이였다.

초혜씨의 무용작품

북경에 다녀 온 후 초혜씨의 꿈이 확고해 졌다. 무작정 무용이 좋았던 초혜씨는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녀는  북경무용학원에 가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이를 악물고 배우고 연습하면서 언젠가는 북경무용학원에 갈 탄탄한 기초를 다져놓았다.

무용수업

드디어 중국의 최고 무용학부인 북경무용학원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피타는 노력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또 안무가라를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시절, 중국 무용대가 “짠잰민” 선생님 제자로 있는 4년동안 그녀는 늘 반장으로 활약했고 안무에 대한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하여 중국 무용업계에선 최고상 인 제9기 도리컵 "桃李杯" (3년에 한번 개최되는 무용전문가 상대 무용콩클) 무용콩클에 학생신분으로 《나홀로 타향에 (独在他乡)》라는 조선민족무용작품을 내놓아 수상했다. 그후 10회, 11회에서도 수상의 영예를 지녔는데 10년동안 학생신분으로 3회  연속 조선족무용 작품을 선보여 수상한건 북경무용학원 교수님을 통털어 초혜씨가 처음이였다.

초혜의 공간에서 부모님과 함께

그녀의 작품을 유심히 살펴보면 모두 우리 조선민족의 정감을 고스란히 담은 무용이다. 그리고 그 작품으로 중국 최고의 무대에서 안무가로서의 실력을 한번 또 한번 인정받았다. 초혜씨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여 온 우리민족의 무용을 더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중국민족민간무용학부에서 석사 공부를 끝내고  ‘초혜무용공간’을 설립했다. 북경은 조선민족이 집거해 사는 곳이 아니여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지금은 입소문을 통해 조선민족무용을 배우러 찾아오는 타민족의 제자들도 수두룩하다. 제자들과의 한시간 수업, 함께 하는 모든 시간들이 소중하기에 그녀는 1년에 한번씩 사비까지 털어가며 그들을 위한 연말회보공연을 조직한다.

공연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먼 훗날 되돌아봤을 때 땀흘려 노력했던 순간들이 고운 추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초혜씨의 "내일"인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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