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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아름다운 해변도시와 한민족의 발자취를 보았습니다"<중>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참관, 한민족의 삶 돌아 봐
류재복 기자  |  yjb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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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26  10: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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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경청주산악회 4박 5일 ‘블라디보스톡’ 여행

     [단독] “아름다운 해변도시와

                    한민족의 발자취를 보았습니다”<중>
   
볼세비키혁명을 기념하고 있는 혁명광장 혁명전사상(革命戰士像) 앞에서

 ‘볼세비키혁명’ 기리는 혁명광장 '혁명전사상' 앞에서 전체 촬영

 3성급 호텔이라 했지만 여행객휴게소 수준으로 시설 미흡

<상>편에 이어

[코리아데일리=류재복 대기자] 이어 블라디보스톡 중앙대호인 ‘스베들란스카야’ 광장 중심에 위치한 ‘혁명광장’을 돌아보았다. 이곳 혁명광장은 옛 소련시절 볼세비키혁명을 기념하여 불리는 이름으로 지금도 그 시절을 상징하듯 혁명전사상(革命戰士像)이 광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혁명전사상을 중심으로 북측에는 옛 일본총영사관, 고려사범대가 있고 우측에는 숨백화점과 우수리극장, 좌측에는 연해주 주청사와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 98명 전원이 혁명전사 동상을 배경으로 현수막을 펼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어 블라디보스톡을 시가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독수리 전망대’에 올랐다. 이곳은 금각만과 시코트 반도가 바라보이는 높이 194m의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블라디보스톡 도시의 남서부분과 금각만, 루스키섬, 블라디보스톡港, 驛 등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매우 장관이었다.
   
독수리전망대서 바라본 블라디보스톡 시내 전경

또 전망대에는 러시아어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동방정교회 선교사였던 ‘성 키릴’, ‘성 메포지’ 형제의 동상이 서 있었다. 블라디보스톡 시가지와 항구, 그리고 그 일대를 알게 하는 금각만과 아무르만, 아울러 주변의 멋진 섬들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연상케 하는 ‘금각교’를 보면서 2일차의 첫 관광을 마치고 저녁식사는 러시아 현지식인 ‘사슬릭’을 보드카를 곁들여 먹은 후 부근의 호텔(ZEMCHUZINA)에 여장을 풀었다. 가이드는 이곳 호텔이 3성급 호텔이라고 했지만 필자의 눈에는 빌딩을 개조한 여행객들의 쉼터로 시설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쇼핑센타 매장 물품 98명이 싹쓸이... 보드카-당근크림-초코렛 인기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참관, 한민족의 삶 돌아 봐

여행 3일차인 8월 6일, 오전 9시 2분에 출발하는 완행열차에 승차를 했다. 이 열차는 ‘블라디보스톡-우골나야’를 운행하는 보통열차로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시발점인 블라디보스톡 驛을 출발, 약 30분간 이동을 했는데 해변가를 달리고 있어 마침 해수욕을 즐기는 러시아 사람들을 차창을 통해 볼 수가 있었다. 열차에서 내린 후에는 버스 3대가 쇼핑센터에 앞에 하차를 시켜 3개의 버스에서 내린 한국인 98명은 약 1시간정도를 쇼핑에 시간을 보냈다.
   
대표적 상품인 '당근크림’과 어린아이 사진이 들어있는 초코렛

이곳 쇼핑센터에는 주로 ‘보드카’. 러시아의 상징인 자작나무로 만든 목각인형 ‘마트로시카’, ‘차가버섯’, 그리고 ‘당근크림’과 어린아이 사진이 들어있는 초코렛 등 기타 물품들을 팔고 있었다. 이날 한국인들은 거액의 달러, 루블화, 원화(한국돈)를 이곳 매장에 풀었다. 필자 역시 10만원 정도 구입을 했다. 이어 버스는 2시간 30분을 이동 ‘우수리스크’로 달렸다. 중간에 탕수육을 곁들인 중국식의 점심을 했는데 그다지 맛이 별로였다.

우수리스크市에 도착한 일행은 먼저 고려인 강제이주 140년을 기념하는 기념관인 ‘고려인문화센터’ 역사박물관을 참관하고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 한인을 대표했던 기관인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를 보았다. 이곳은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열렸던 회의 장소로 당시 대한국민의회(고려국민회)결성지로서 전로한족회 대표자회의가 개최된 곳으로 러시아혁명 직후인 1917년 5월 21일부터 31일까지 러시아 전 지역의 고려인대표 100명이 모여 11일간 총회를 마친 후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를 조직한 곳이었다.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 전경

이곳은 우스리스크 블로다르스카야 15번지 앞과 우수리스크시 체체리나 15번지 일대에서 가까운 거북이 공원이 근처에 있으며 현재는 러시아 초등학교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어 한인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최재형 선생 생가를 참관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의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그의 생가는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며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거주하여 1920년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살았던 생가다.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 지역의 명사로서 사업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지만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돈을 사용하지 않았고 오직 한인을 위한 도로와 학교 건설, 그리고 독립군의 자금 지원 등에만 사용을 하는 등 그는 오직 우리 한민족 동포들만을 위해 일생을 보냈다.

고구려-발해시대 유물로 불리는 '거북이동상'에서 한민족 혼(魂) 발견

최재형-이상설 선생의 독립활동을 새롭게 인지한 귀한 시간
   
고구려-발해 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거북이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있는 회원들

최재형 선생은 특히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세발의 총성을 통해 저격할 수 있었던 그 권총을 전달한 사람으로 1년전인 1908년 4월, 이범윤, 이위종 등과 함께 연추(현재 크라스키노)에서 의병단체인 ‘동의회’를 결성 총재를 맡았다.

당시 ‘동의회’ 단원인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단원 12명과 비밀결사체 ‘동의단지회’를 조직하고 결연한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를 자르고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글자의 혈서를 남겨 현재까지 후손들에게 또렷이 남겨주고 있다. 그의 생가는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 살았던 집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초라하고 소박했는데 이는 바로 그의 곧은 성품을 잘 반영해주는 것으로 보였다.

이어 고구려 또는 발해시대의 유적으로 불리는 ‘거북이 공원’에서 거북이 동상을 보았다. 거북이 공원에 대하여는 우스리스크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시민공원 한가운데 세워진 ‘돌 거북이상’ 때문에 시민공원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거북이 공원'이라는 별칭으로 많이 불리는 장소라 한다. 원래 이곳 지역 인근에서 발견한 2개의 동상 중 하나만을 공원에 옮긴 것으로, 남은 하나는 하바로프스크의 박물관에 전시 중이라고 한다. 비문이 없어 거북이 동상이 만들어진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여진족의 근거지로 알려진 이 지역에서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추정했을 때, 여진족이 만든 것들로 보여지고 있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있는 회원들

이어 버스를 타고 이동,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이상설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이상설선생 유허비’를 참관했다. 충북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이상설 선생은 25세 때 과거 시험에 합격, 27세 때 성균관 교수를 역임할 만큼 총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참여, 그곳에서 이상설은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려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진 못했다.

이후 그는 1910년 성명회를 조직, 한일합방 반대 운동 및 합방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각국에 발송하는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1911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최재형, 김학만 등과 권업회를 조직,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교민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1914년에는 이동휘, 이동녕 등과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대통령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또 1906년 현재의 중국 연변 용정에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특히 이상설은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해가자 고종에게 자결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이상설은 1917년 3월, 마지막 유언을 통해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했다. <하>편에 계속
   
최재형 생가의 기념비 앞에 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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