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전설이 주는 천의 명산 무엇이길래

[코리아데일리 강유미 기자] 계룡산은 예로부터 계람산(鷄藍山)·옹산(翁山)·서악(西嶽)·중악(中嶽)·계악(鷄嶽) 등 여러 가지 이칭으로 불렸다. 중국의 문헌에도 당나라 장초회(張楚會)의 『한원(翰苑)』백제조에 ‘계룡동치(鷄龍東峙)’니 ‘국동유계람산(國東有鷄藍山)’이니 한 것은 모두 이 산을 가리킨 것이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이른바 ‘신라5악’ 중의 서악으로서 제를 올려 왔다. 조선 시대에는 묘향산의 상악단(上嶽壇),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이 산에 중악단을 설치하고 봄가을에 산신제를 올렸다. 계람산이라는 이름은 계곡의 물이 쪽빛같이 푸른 데서 나온 것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4대 명산 또는 4대 진산이라고 일컬어 왔으므로 역사가 얽힌 유적과 유물이 많다. 그 중 갑사와 동학사가 유명하다. 갑사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절로서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이다.

▲ 신의 경지가 주는 계룡산

420년(구이신왕 1)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4년인호(印浩)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는 보물 제256호인 갑사철당간 및 지주, 보물 제257호인 갑사부도, 보물 제478호인 갑사동종, 석조약사여래입상·석조보살입상·사적비·표충원(表忠院)·공우탑(功牛塔)·대적전(大寂殿)·천불전(千佛殿) 등을 비롯하여 31개의 『월인석보』 판목 등이 있다.

갑사에서 용문폭포를 따라 1.3㎞쯤 오르면 왼쪽에 신흥암(新興庵)이 있고, 그 뒤쪽에 천진보탑(天眞寶塔)이 있다. 이 천진보탑은 천연 석탑으로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전한다. 갑사와 등지고 있는 동학사는 비구니의 강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 때 회의(懷義)가 그의 스승 상원(上願)의 사리탑을 세우고 창건하였으며, 절 동쪽에 학바위[鶴巖]가 있어서 ‘동학사’라 하였다. 이 절에는 김시습(金時習)이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냈던 숙모전과 길재(吉再)가 공민왕과 정몽주(鄭夢周)를 제사지냈던 삼은각이 있다.

갑사 대웅전으로 가는 다리 밑 계곡에는 군자대(君子臺)가 있는데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 오경감(吳景鑑)이 퇴관한 뒤 이곳에 와서 울창한 수목과 기묘한 암석 사이를 굽이치는 맑은 물을 보고 가히 군자가 수양할 만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원사(新元寺)는 계룡면 양화리에 있는 고찰이다. 652년(의자왕 12)보덕(普德)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절 이름은 본디 신정사(神定寺)라 하던 것을 뒤에 신원사(神元寺)라 하였다가 1885년(고종 22)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경내에는 동쪽에 중악단(中嶽壇), 동남쪽에 5층석탑이 있다.

중악단은 신라 시대 이래의 산신 제단으로 조선 초에는 무학(無學)의 현몽으로 태조가 이곳에서 계룡산 산신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 단은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산신 제단으로써 1879년에 중수하였다.

그리고 이 절의 부속 암자인 고왕암(古王庵)은 660년에 창건하고 1419년에 중건한 암자로, 백제 말에 의자왕이 이곳에 숨었다가 소정방(蘇定方)에게 붙잡혔다는 전설이 있다.

동학사에서 갑사로 가는 도중의 청량사(淸凉寺) 터에는 남매탑(男妹塔)이라는 두 개의 탑이 있는데, 7층탑을 오라비탑이라 하고 5층탑을 오누이탑이라 하여 합해서 오누이탑으로 불린다. 이 탑들은 고려 시대에 세워졌다고 전하나, 백제석탑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얽혀 있다.

백제의 왕족 하나가 이곳에 와서 수도하고 있을 때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호랑이를 구해주었더니, 호랑이는 며칠 뒤 예쁜 처녀 하나를 업어왔다. 왕족은 그 처녀를 고이 돌려보냈으나, 그 부모가 딸을 다른 데로 시집 보낼 수 없다 하고 다시 왕족에게로 보냈다.

왕족은 하는 수 없이 누이로 맞이하여 남매가 함께 수도하여 마침내 성도하였다. 그들이 죽은 뒤 몸에서 많은 사리가 나와 사람들이 이 탑을 세워 오누이를 공양하였다고 한다.

조선태조는 이곳으로 천도하기 위해서 궁궐 영조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조운(漕運)의 불편 등 왕도로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에 따라 중단하였으며, 지금도 부남리에는 초석으로 다듬어진 암석이 94개나 있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에는 동문거리·서문거리 등의 지명과 함께 신도 역사의 인부들이 일을 마치고 짚신을 털어 봉우리가 되었다는 신터리봉도 있다. 사적지와 명승지로서 널리 알려진 계룡산에 신비감까지 보태준 것이 곧 『정감록』이다.

이 책은 여러 이본이 있어 종잡을 수 없는 대목도 많은 것 같으나,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완산백(完山伯)의 두 아들 이심(李沁)과 이연(李淵)의 형제가 정공(鄭公)이라고 일컬어진 사람과의 문답을 중심으로 한 「감결 鑑訣」이 있다.

그 밖에는 세전(世傳)하는 예언적 문서들을 한데 묶어놓은 것인 만큼 통일성이나 일관성이 없는데 있는 그대로 계룡산에 관한 기록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정감록』에 적힌 계룡산은 크게 미래의 도읍지라는 것과 피란지라는 것의 두 가지로 집약된다.

먼저 도읍지로서는 「감결」에서 이심이 “……산천의 뭉친 정기가 계룡산에 들어가니 정씨 800년의 땅이다.”라고 하여 한양에 도읍한 이조 500년이 지나면 계룡산에 도읍한 정조(鄭朝) 800년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이어서 정공은 “계룡 개국에 변(卞)씨 재상에 배(裵)씨 장수가 개국원훈이고, 방(房)씨와 우(牛)가가 수족과 같으리라.” 하여 개국의 상황까지를 구체적으로 내다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체적 예언은 「감결」의 부록인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祕記)」에도 “계룡산에 도읍지가 있으니 정씨가 이곳에 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복덕(福德)은 이씨에 미치지 못한다. 다만, 밝고 의로운 임금이 많이 나와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피란지로서는 장차 ‘12년 병화’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큰 변란이 일어나는데, 그 시기를 암시하는 말들 가운데 ‘계룡의 돌이 희어질 때’라 하였다. 이런 큰 난리를 피하여 살아남을 곳으로 이른바 ‘십승지’라는 것을 열거하였는데, 그 중 계룡산 또는 계룡산 인근 지역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승지는 「감결」에 두 군데 외에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蓭山水十勝保吉之地)」 등에 보여 지명도 들쭉날쭉 일정하지 않다. 처음 나온 십승지에서는 계룡산이 아예 빠져 있으나, 이어서 여러 문답 끝에 “계룡산의 남쪽 바깥의 네 고을 또한 인민이 보신할 만한 곳이다.”라 하였다.

두번째 나온 십승지에는 “공주 계룡산 유구(維鳩) 마곡(麻谷) 양수지간의 둘레 200리 안은 가히 난리를 피할 만하다.”고 명기하고, 다시 “동북 정선현(東北旌善縣) 상원산(上元山) 계룡봉(鷄龍峯) 또한 가(可)하다.”고 하였다.

남격암은 십승지에는 넣지 않았으나 그 밖의 ‘장신지소(藏身之所)’라 하여 17개의 명산을 적었는데 그 열 번째에 계룡산을 들었다. 이와 같이, 계룡산은 문서에 따라 십승지에 들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였으나 빠진 경우에도 그냥 빠뜨리기가 아쉬워 꼭 언급하고 넘어간 것을 보면, 역시 피란지로서 공인을 받았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어떻든, 한말부터 세태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정감록』 등의 도참설에 매혹되어 계룡산에 관심을 점차 가지기 시작하더니, 민족 항일기 말기에 들어서는 무속 등 전래의 토속 신앙을 비롯하여 각종 신흥종교 및 유사종교가 계룡산 신도안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 중 주류를 이룬 것은 동학(東學)과 정역사상(正易思想)이었다. 이들 신봉자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수도장으로서 피란처를 겸하여 들어왔으나 차차 종교적 형태를 갖추어 가면서 분파에 분파를 거듭하여 수없는 유사종교의 집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처음 동학계통의 시천교(侍天敎) 교주 김연국(金演局)이 1912년 신도안을 답사하고 이듬해 많은 토지를 사들였다. 그러다가 1920년 교당을 신축하여 이듬해 시천교의 본부를 그곳으로 옮긴 뒤 각종 신흥종교가 따라 들어오거나, 이곳에서 새로 일어나고 분열되고 하면서 마침내 계룡산은 사교의 요람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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