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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재조명한 ‘경복궁 습격사건’ 명성황후 감춰준 추악한 현장
정은채 기자  |  news@ikorea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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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21  18: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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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재조명한 ‘경복궁 습격사건’ 진실은 무엇?

[정은채 기자]

21일 방송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경복궁 습격사건을 다루면서 명성황후 시해에 관련된 추악한 역사를 다룬다.

이 사건의 발발은 1894년 7월 23일(고종 31년) 새벽, 총과 칼로 완전 무장한 일본군이 영추문을 부수고 경복궁에 무단 침입했다.
   
▲ 추악한 역사를 품에 안고 있는 경복궁

우리가 보통 을미사변이라고 부르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은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새벽 조선 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우의 현지 지휘하에 일본군수비대와 영사경찰 및 왜인 낭인배 등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조선의 왕비인 민비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불태워 버린 야만적 사건이다.

명성황후 사건현장에서 일본인 경찰과 낭인배를 지휘한 것이 일본의 정규군 장교였고, 사전에 이 음모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지시한 것은 일본공사 미우라였다.

그를 추천한 것은 그의 전임자이자 7인의 원로 중 한 사람인 이노우에였고, 그의 추천에 의해 미우라를 조선에 파견하여 임무를 부여한 것은 이토내각이었고 히로시마감옥에 수감된 미우라 등 범죄인들을 일본 정부에서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석방한 것은 이듬해 1월 20일이었다.

감옥에 있을 당시 그들은 일본의 관민으로부터 영웅처럼 대접받았고, 미우라가 석방되자 일본왕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 모두 사건과 일본정부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며 일본의 입장은 '여우사냥'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암호명이 말해주듯 국가적 전쟁 선포와 같은 것이었다.

외교적 어려움에 처한 일본정부는 이노우에는 휴가를 명목으로 일본에 귀국하여 내각회의에 참석하였고, 한 달여 뒤 조선에 돌아와 300만 엔의 기증금을 조선에 제공하겠다고 공언하는 등 조선왕실을 회유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 자신이 천거한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부임한 뒤로도 한동안 일본공사관에 더 머무른 뒤 서울을 떠났다.

예비역 육군중장인 미우라는 참선승을 자처하며, 남산의 일본공사관에 은거하여 외부와 접촉을 피하였던 것이었다.
   
▲ 경복궁습격사건에 가장 큰 피해를 당한 명성황후 (사진출처 명성황후 영화 한 장면 )

그러나 얼마 뒤 일본공사관 밀실에서는 미우라를 중심으로 왕비제거를 위한 흉계가 꾸며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노욕에 빠진 흥선대원군을 가담시키고, 행동대로는 해산설이 나돌던 조선군 훈련대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사건을 살펴보면 "일본군이 조선 왕궁으로 향하는 도중 조선병 일행에게 사격 당했으며, 이에 응전 조선병을 물리치고 조선왕궁을 삼엄하게 지켰다" - 1894年 7月 25日, 마이니치 신문

예고 없는 일본군의 난입으로 혼란에 휩싸인 경복궁! 궐 안으로 침입한 일본군은 궁을 지키던 조선군의 무기를 빼앗고, 고종 앞에 칼을 겨누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만다. 그런데 당시 사건을 보도한 일본 신문의 기사 내용에는, 사실과는 정 반대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일본 측은 어디까지나 우발적 상황이었으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들이 조선의 왕을 호위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왕궁 습격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였다는 사실이 당시 청일전쟁의 전사(戰史)를 기록한 문서 초안을 통해 밝혀지며 그 실체가 드러났다.

경복궁 습격 이틀 뒤, 풍도 앞바다에서 조우한 청군 함대에 일본군은 뜬금없이 선제포격을 가한다. 그렇게 예고도, 명분도 없이 발발한 청일 전쟁. 상대는 당시 동아시아의 맹주로 떠올랐던 막강한 군사력의 청나라. 일본이 군사 강국이었던 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쟁의 선전포고는 전쟁 발발 일주일 후에야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때 일본이 내놓은 선전포고의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패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일본의 선전포고의 내용은 경복궁 습격부터 청일전쟁까지 일련의 사건들이 일본이 그려놓은 그림의 물밑작업에 불과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곳에 시체로 버려진 농민군이 680명에 달했으며, 근방은 악취가 진동했고, 땅 위에는 죽은 사람 기름이 얼어붙어 있어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과 같았다' - 일본 19대대 후비병사의 진중일기 中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하고 조선 땅에서 전쟁이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농민군들은 '척양척왜(斥攘斥倭)'를 외치며 전국 곳곳에서 봉기한다.

조일연합군과 동학농민군의 대규모 격전이 벌어진 공주 ‘우금치 고개’, 갖춘 무기도 변변치 않았던 농민군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결사항전 정신으로 전투에 임한다. 결국, 농민군들은 일본군의 근대 기관총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다.

위기의 처한 나라를 위해 싸운 동학농민군의 한(恨)을 엿볼 수 있는 비화부터, 일본의 본격적인 야욕이 드러난 경복궁 습격사건, 청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21일) 오후 9시 40분 '역사저널 그날'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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