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남진은 어머니의 눈물겨운 모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코리아데일리 정은채 기자] 17일 오전 방송된 KBS1 교양프로그램 '아침마당'은 '도전 꿈의무대'로 꾸며졌다. 가수 김연택 전천후 최진아 춘향이 노성일이 출연했다. 패널로는 김혜영 황기순과 함께 가수 남진이 참여했으며, 김재원 이정민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았다.

이 방송이 주목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으면서 오늘의 남진을 있게 만든 장기순 여사의 모정이 시청자들에게 훈훈한 정 또한 화제다.

영원한 가요계 황제로 아직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가수 남진의 생애와 그가 가수로 탄생하기 까지 눈물로 헌신해온 어머니 장기순 여사의 얽힌 비화가 17일 아침마당과 함께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 예전 한 무대에서 어머니의 각별한 정을 전해주고 있는 남진 (사진 코리아데일리 DB)

이중 효자 가수로 유명한 가수 남진이 그동안 남긴 수 많은 히트곡 가운데 가장 가슴을 아픈 노래는 ‘어머니’다.

어머니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내셨어요/ 백날을 하루같이 이 못난 자식 위해/ 손발이 금이가고 잔주름이 굵어지신 어머님/ 몸만은 떠나있어도 어머님을 잊으오리까/ 오래 오래 사세요 편히 한 번 모시리라/라는 가사가 전해주듯이 남진이 가장 아끼고 자신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이다.

이 노래의 탄생의 비밀은 50세에 남진을 얻은 아버지 김문옥(목포일보 사장) 씨가 남진을 정치인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남진은 가수가 좋아서 가요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에 어머니 장기순 여사의 힘과 남다른 애정이 평생 잊지 않는다는 마음에서 이 노래를 취입했고 그의 명곡중 하나로 탄생되어 많은 이들이 부르고 있다.

남진 어머니의 눈물겨운 모정은 남진의 출생부터 이어진다.

아버지 김문옥과 어머니 장기순 사이에서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남진(본명 김남진)은 어린 시절 아버지 덕분에 목포 최고의 부잣집으로 불릴만큼 꽤 부유하게 자랐다.

아버지 김문옥은 목포를 주름잡는 거부이자 야당계의 거물이었다. 신익희, 조병옥 등이 호남 지역에 가면 항상 그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인사차 자루 들렀고 하지만 형 김상진이 아버지를 이어 신문사 및 정계에 관련된 사업을 이어가자 남진은 아버지처럼 정계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인기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 후 목포고를 졸업하고 무작정 가수가 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그의 처음 꿈은 가수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배우의 꿈을 가지고 있었고 남진은 아버지 몰래 어머니의 도움으로 한양대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다.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는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당시 연예인을 폄하하는 풍조에 의해 김 씨 집안에 딴따라를 둘수 없다고 반대가 극심했고 심지어 돈이 떨어지면 목포로 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용돈과 학비를 보내지 않았다.

그럴 때 마다 어려움을 해결 시켜준게 어머니 였고 어머니의 눈물겨운 헌신의 모정이 오늘앙 한국 가요계의 기둥으로 가수왕이 된 남진의 밑거름이 되었다.

어머니의 헌신어린 보살핌으로 배우 지망생이던 남진은 약 2년을 한동훈 음악학원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1965년에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표하면서 팝 가수로 데뷔하는 동기가 된다.

그러나 남진은 데뷔 당시 여러 팝 장르의 노래들을 불렀지만 히트를 하지는 못했다.

이런 그에게 든든한 후원자였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자식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탄생된 ‘울려고 내가 왔나’가 처음으로 히트하자 그는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였으며 1967년에 히트곡메이커였던 작곡가 박춘석의 ‘가슴 아프게’ 를 부르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인연으로 남진의 어머니가 평생에 걸쳐서 좋아한 노래도 ‘울려고 내가 왔나’였고 이 노래의 탄생을 남진 어머니의 공이 가장 컸다.

남진은 가수였지만 1967년에 박상호 감독의 영화 ‘가슴 아프게’에 주연으로 처음 출연하면서 부터 영화배우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그 해에 장일호 감독의 영화 ‘그리움은 가슴마다’에 주연으로 출연하였는데 국도극장에서 처음 개봉하여 약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시킨 흥행작으로 지방에서도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올렸다. 데뷔와 동시에 인기를 얻었던 남진은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해병 2여단 2대대 5중대 2소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 역시 어머니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1971년에 전역한 후 ‘마음이 고와야지’ 를 발표하였고 서울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복직 당시 정통 트로트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나훈아와 가요계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1972년에 ‘님과 함께’ 를 발표하며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되었고 톱 가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훈아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게 되면서 1970년대의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남진과 나훈아는 서로 호남과 영남 출신의 가수로서 지역 사이에서 경쟁을 벌였으며 박진감 넘치고 활발한 성격의 남진과 조용하고 서정적인 성격을 가진 나훈아의 차이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1970년대의 가요계를 이끌었다. 당시 가수왕에는 줄곧 남진이 1등을 하여 가수왕상을 수상하고 나훈아는 2등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전성기를 맞이한 남진과 나훈아를 꺾을 가수가 없었다.

한편 남진이 어머니의 영향력을 크게 받은 것은 그가 데뷔할 때에는 시대상으로 정부가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왜색가요라고 시비를 불러일으켰고 방송가요심의전문위원회가 발족되어 창조적이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한 가요와 왜색가요는 방송의 규제를 받게 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암흑기가 도래하게 되어 좌절을 겪을 때 마다 어머니의 모정은 그에게 큰 힘이되었다.

남진에 대해 대중가요 한 전문가는 17일 코리아데일리 전화에서 “남진은 한 평생을 대중가요의 활성화를 불러일으키면서 트로트 말고도 다양한 장르가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계기가 마련되어 대중음악이 더욱 발전시킨 선구자적인 가수이다”고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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