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화면 캡쳐

[코리아데일리 김민정 기자]

‘양승태 대법원’이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댓글 대선개입’ 사건에 연루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67)의 항소심 판결 선고 전후 의견을 나누고 해당 재판부 동향을 파악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났다. 청와대는 원 전 원장에게 항소심에서 실형이 선고되자 ‘큰 불만’을 표시했고, 대법원은 원 전 원장 재판을 당시 최대 현안이었던 상고법원 도입 문제와 결부시켜 활용하려는 전략도 세웠다. 대법원이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조사했다는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도 사실로 확인됐다. 헌법이 규정한 삼권분립과 법관의 독립을 훼손한 것으로 일선 판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22일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정당한 절차 없이 법관의 동향을 파악하고 성향을 분석, 사법행정상 필요를 넘어 법관의 독립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문건이 다수 발견됐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인사모 및 공동학술대회 문건 △판사회의 및 사법행정위원회 관련 문건 △법관에 대한 동향 파악 문건 △특정 사건(원세훈 재판) 담당재판부의 동향 파악 문건 등이 확인됐다. 추가조사위원회가 “인사와 기관 협조, 여론 대응 등 사법행정의 필요와 목적에 맞는 문서는 제외했다”고 밝힌 만큼 정상적인 사법행정 범위를 벗어난 법원행정처의 업무 관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추가조사위가 공개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문건을 보면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국정원법 위반 사건 항소심 선고 전망에 대한 청와대 문의에 대해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는 우회적·간접적인 방법으로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림”이라고 기재돼있다. 선고가 나오기도 전에 대법원이 재판부 의중을 파악해 청와대에 전달하려고 한 것이다. 이 문건은 항소심 선고 다음날인 2015년 2월10일 작성됐다.

원 전 원장이 항소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자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51)이 법원행정처에 불만을 표하며 사실상 재판 지휘까지 한 대목도 있다. 문건에는 “(우 전 수석이) 사법부에 대한 큰 불만을 표시하면서, 향후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하고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줄 것을 희망”한다고 적혀 있다.

법원행정처는 청와대의 요구를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정무적 대응방향’을 검토했다. 문건에는 “(원 전 원장에 대한) 상고심 판단이 남아 있고 BH(청와대)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는 국면”이라며 “발상을 전환하면 이제 대법원이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쥘 수도 있음”이라고 쓰여 있다.

또한 양승태 대법원이 조직적으로 일선 판사들을 뒷조사한 정황을 보여주는 문건들도 이날 함께 공개됐다. 2016년 8월24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이 작성했다는 ‘각급 법원 주기적 점검 방안’ 문건을 보면 판사의 업무 외 영역에 대해서도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신뢰할 수 있는 거점법관’을 법원마다 두는 등 비공식적인 방법을 망라해 판사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수집이 필요하다고 돼있다. 판사들의 법원 내부통신망 코트넷 게시글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등 개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념적 성향·외부활동·성격·가족관계 등도 법원행정처는 세세히 수집했다.

추가조사위는 “법관이 사법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했다는 이유로 사법행정 담당자가 법관들에 관한 자료를 폭넓게 수집해 이념적 성향, 인적 관계와 행적 등을 분석·평가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했다면 이러한 문서는 그 대응 방안이 실현됐는지 또는 인사상의 불이익 조치가 있었는지 여부를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법관의 독립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법원 및 행정처를 총괄 지휘한 양 전 원장의 책임론이 거셀 것으로 보인다. 행정처의 사찰행위 대부분이 양 전 원장의 ‘숙원사업’이던 상고법원 설치 등에 대한 법원 내부 비판에 대응하는 구도라는 점에서, 뒷조사 역시 양 전 원장의 묵인 아래 이뤄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권의 정당성을 흔들 수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을 두고 청와대와 ‘거래’를 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상고심 재판에 직접 참여한 양 전 원장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원 전 원장 재판에 참여한 대법원장은 물론 대법관들도 모두 책임져야 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추가조사위의 활동이 종료됨에 따라 김명수 대법원장의 입장 표명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린다. 개선방안이 법원행정처의 역할에 대한 법원 구성원들의 의견을 담아내지 못할 경우 고소·고발 등 법원 밖으로 논란이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 대법원장은 22일 퇴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보고서 내용을 잘 검토하고 있다"며 "심사숙고해 조만간 입장을 정리해 발표하도록 하겠다"고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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