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회암 지괴(calcareous massif)인 몽 페르뒤(Mont Perdu) 정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피레네 산맥’

[코리아데일리 곽지영 기자]

13일 ‘피레네 산맥’이 화제다.

‘피레네 산맥’은 프랑스와 에스파냐 국경에 걸쳐 있는 이 훌륭한 산악 경관은 3,352m에 이르는 석회암 지괴(calcareous massif)인 몽 페르뒤(Mont Perdu) 정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의 총 면적은 3,639㏊이다. 에스파냐 쪽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깊은 협곡이 두 개 있으며, 프랑스 쪽으로는 보다 가파른 북부 경사지 위에 주요 권곡(圈谷, 빙하 침식 골짜기 상류 쪽 끝에 있는 웅덩이 모양의 지형) 세 개가 있다.

이들은 지질에 따른 전형적인 지형을 보여 준다. 이곳에는 한때 유럽 고지대에 널리 퍼졌으나 이제는 피레네(Pyrénées)에서만 볼 수 있는 농업 방식을 반영하는 전원 경관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마을, 농장, 밭, 고지대 목축지, 산악 도로 등에서는 과거 유럽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피레네 산맥’에서 바라본 정상의 풍경 (사진 코리아데일리 DB)

이 산맥은 또 브루노 아르파이아가 발터 벤야민의 마지막 생애를 소설화한 <역사의 천사>가 무척 감동적이라고 제이 파리니가 전하는 특별함이 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국경에 걸쳐 있는 이 유적은 피레네 산맥에 3,352m로 솟아있는 몽 페르뒤 정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레네 산맥은 이베리아(lberian) 판과 서유럽 판의 충돌 지점이다.

피레네 산맥에서 지질학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몽 페르뒤의 석회암 지괴이다. 북쪽 경관(프랑스) 지역은 커다란 권곡 세 개가 불쑥 나타나는 반면, 남쪽 비탈면(에스파냐)은 이베리아 고원 쪽으로 기울어진 깊은 계곡이 세 방향으로 뻗어 있다. 북부와 남부의 비탈면은 기후도 다르다. 프랑스 쪽은 습윤한 반면, 에스파냐 쪽 사면은 건조하다. 해양의 영향을 받는 서쪽에서 지중해성 기후인 동쪽으로 갈수록 기후가 달라진다.

피레네 산맥은 두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 지질학적 구조와 기후가 서로 다르므로, 다양한 식생(vegetation)이 모자이크 형태로 펼쳐져 있다. 이 식생 형태는 아지중해성(sub-Mediterranean), 동일선상 지대(collinean), 저산대(montane), 아고산대(subalpine), 고산대(alpine)와 같이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식물은 다양하고(3,500종과 아종) 풍부하며 고유종도 전체의 5%나 된다. 그리고 피레네 산맥을 대표하는 야생동물들도 많다. 그중 포유류로는 마멋(marmot)과 에스파냐 아이벡스(Spanish ibex)와 같은 유제류(ungulate)가 있다. 아이벡스는 암컷이 세 마리 밖에 없다. 곤충을 먹는 피레네 데스만(desman)도 저지대에서 발견되었다. 조류, 파충류, 양서류와 딱정벌레류도 많이 서식하고 있다.

이곳에는 초기 구석기 시대(기원전 40000~10000)부터 인류가 정착했는데, 그 사실은 아니스클로(Anisclo) 동굴과 에스쿠아인(Escuain) 동굴, 가바르니 환상열석(Gavarnie stone circles, 선돌을 둥근 고리 모양으로 배열한 것), 텔라 돌멘(고인돌)과 같은 유적에서 알 수 있다. 영구 정착촌은 중세 때부터 역사에 등장했다. 석회암 지괴는 유적과 접해 있는 에스파냐, 프랑스 마을을 왕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정착하면서 자연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몸집이 큰 포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사라지거나 상당수 감소했다. 최근에는 마멋과 같은 몇 종을 다시 들여왔다. 벌목과 화재로 원시림이 없어졌지만 지금은 회복되고 있다. 많은 지역에서 목축을 했으나 오르데사(Ordessa) 국립공원에서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수세기 동안 이동 방목이 계속되었으며, 프랑스와 에스파냐 국경을 넘어 가축을 몰고 이동했다. 두 지역을 걸어서 오갈 수 있는 오래된 길이 있는데, 이 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도로의 지선(branch)이었다.

인류는 이와 같은 경관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 흔적은 유적과 사람들의 기억 덕분에 어디서든 볼 수 있다. 고도가 높아 사람이 살기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사람들은 이곳에 정착하여 의미 있는 자연유산을 이루었다.

전설에 따르면 몽 페르뒤는 천국과 지상을 하나로 이어 주는 세상의 중심, 트레 세롤스(Tres Serols)가 있는 지리적 공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옛날이야기에서 나온 것인데, 그 자체가 상징적 의미로 국경 역할을 하기도 하고, 전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 측면에서는 명확하게 경계가 정해져 있으며, 그 토양은 인간과 환경의 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지질, 지형의 기복, 물의 작용, 기후와 관련하여 특징이 명확하다.

자연 조건이 좋아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다. 초기에는 유목을 하다가 나중에는 정착 생활을 했다. 그 정착촌이 조직화하면서 계곡과 경사지뿐만 아니라 고산 초지, 숲, 암벽, 산길, 물, 광물자원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는 초기 구석기 시대(기원전 40000~10000)부터 인류가 정착했는데, 그 사실은 아니스클로 동굴과 에스쿠아인 동굴, 가바르니 환상열석, 텔라 돌멘과 같은 유적에서 알 수 있다. 영구 정착촌은 중세 때부터 역사에 등장했다. 이곳은 산비탈과 계곡에 자리하고 있으며 아라(Ara), 예사(Yesa), 아소(Aso)와 벨로스(Vellos), 야가(Yaga), 바로사(Barrosa),킨카(Cinca), 네스테 도르(Neste d'Aure), 가베 드 가바르니(Gaves de Gavamie), 헤아스(Héas)의 수로망을 따라 형성되었다.

여기서는 산길과 다리, 도로, 가옥, 병원을 볼 수 있다. 병원에는 가바르니, 부야렐로(Bujarelo), 아랑뉴에트(Aragnouet), 파르잔(Parzan), 헤아스(Héas), 피네타(Pineta)가 있다. 인간과 가축떼는 초원의 식물과 삼림 지대에 여러 영향을 주었다. 골리(Gaulis), 비뉴말(Ossoue, vignemale)과 같이 고산 초지를 이용한 것은 이동 방목을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몽 페르뒤의 계곡과 산길은 양쪽 마을 사이의 접촉 통로였으므로, 아래 평원에 있는 마을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 그 결과 오래 전부터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된 사법, 정치 제도가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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