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이젠 말할 수 있다’ ‘따뜻함을 안겨주었던’ 감춰진 눈물

[코리아데일리 이규희 기자]

1일 민주열사 인 이한열 열사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한열(李韓烈, 1966년 전남 화순 출생)은 학생운동가이다.

연세대학교 동아리 '만화사랑'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반전두환운동에 가담, 1987년 6월 시위 참여 중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여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다.

이러한 이한열 열사가 주목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따뜻함을 안겨주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있었다면 딱 한 해 전, 1987 그 가장 뜨거웠던 해가 있었다는 것같은 배경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온도차가 있기 때문이다.

▲ 이헌열 열사의 사망전 모습

1987 그 해에는 서울대 언어학과 박종철 학생은 경찰의 고문 끝에 사망했다. 그 일로 인해 경찰은 시신을 불태워 부검을 하지 못하게 하고 사건을 덮으려고 했으나, 사망당일 당직검사였던 최검사(하정우 분)는 서명을 거부한다

그는 결국 이 일로 부검에는 성공하였으나 검사직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사실 하정우가 주연이라고 생각했던 저로서는 그 뒤로 줄어든 그의 비중에 "응?"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고 극 중에서 교도관 한병용 씨로 나오는 유해진 재야 정치인인 김정남 역할로 나오는 설경구 헉 하는 캐스팅이 계속 되는 가운데 히로인이 나오는 영화에 익숙한 한 영화인으로서는 "대체 주인공이 누구지?"라는 혼란이 올법도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 영화에는 영웅이 없었기 때문이며 모두들 최소한의 양심으로 최대의 용기를 내 움직인 일반인들이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한 그리고 정말 비슷한 사람이다. 그래서 어쩌면 더 김태리가 연기한 연희역에 더 몰입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었고 고문치사의 실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전달하고자 했던 유해진은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한다.

연희는 이로부터 피해보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사건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연희는 유해진의 조카였고 또 이한열 열사와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나오며 사진 속 인물들은 박종철 열사의 가족들이 아니다.

민주화는 영웅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불을 지핀 것은 시민이었고 그 과정에서 용기를 낸 한 사람 한 사람의 공들이 모여 더 큰 용기를 만들었고 마침내 이룩한 것이었다

박종철 사건으로 희생된 희생자 이한열은 1966년 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이병렬과 배은심의 2남 3녀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전남 화순에서 지냈으며,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 동산초등학교와 동성중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에 벌어진 1980년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고 학생운동에 투신을 결심하게 됐다. 그뒤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대입 시험에서 낙방하였다. 그뒤 1년간 종로학원에서 재수후,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다.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하였다.

1987년 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22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일부 전경이 시위진압 도중 시위대를 겨냥해서 최루탄 SY44를 총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머리에 맞은 것이다.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도서관학과)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 피를 흘리는 사진을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이 촬영하였고, 중앙일보,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리기도 하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87년 7월 9일 그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民主國民葬) 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한 청년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에 대해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고조된 학생운동의 분위기는 6.10 항쟁과 사실상 군사정권의 항복 선언인 6.29 선언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한편, 29주기가 되는 2016년 6월 9일에는 추모하는 동판이 연세대학교 정문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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