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최고의 양심적인 정치인 그가 그리운 이유?

[코리아데일리 강유미 기자]

김근태 선생은 한국의 정치가. 군부 정권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로서 제15~17대 국회의원, 노무현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 열린우리당 의장 등을 지낸 이 시대의 양심적인 정치인이었다.

이러한 국내 최고의 양심적인 정치인 고(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6주기 추모행사가 29일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오전 서울 도봉구 창동성당에서 열린 '민주주의자 고 김근태 선생 6주기' 추도식에는 추미애 대표를 비롯해 박병석·문희상·이종걸·설훈·이인영·박영선 의원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 민주당 주요 인사들이 집결했다.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도 자리에 참석했다.

▲ 김근태 (사진 코리아데일리 DB)

김 전 상임고문의 경기고 선후배인 손학규 국민의당 고문과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김 전 상임고문 측근인 우원식 원내대표는 오전 추도식은 여야 원내대표 회동으로 불참했지만 협상이 끝난 뒤 오후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 추모식에 참석했다. 모란공원 추모식에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함께 했다.

정권교체 후 첫 추모미사인 만큼 분위기는 밝았다. 추미애 대표는 추모사에서 "지난해 추모미사 때는 망망했다. 그런데 올해는 마음이 따뜻한 겨울"이라며 "의장님을 추모하는 오늘 우리는 비로소 얼굴을 들 수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 정치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산 김근태 선생의 생애를 네이버 인물 백과사전을 통해서 보면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소설가 김국태(金國泰, 1938~2007)의 동생이다.

1947년 2월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서울 광신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6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1967년 상과대학 대의원회 의장이 되어 제6대 대통령선거를 부정선거로 규탄하는 시위를 이끌다 경찰에 붙잡혀 제적을 당하고 강제로 군대에 입대당하기도 했다.

1970년 8월 만기 제대하여 복학한 뒤에도 학생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71년 2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수배되어 첫 번째 도피 생활을 시작하였다. 수배 중인 1972년 당시 상과대학 학장이던 변형윤 교수 등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75년 헌법 비방이나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 없는 학생시위·집회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되는 등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끝날 때까지 7년 넘게 수배자 생활을 하였다. 수배 중이던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 출신으로 인천 부평의 봉제공장에서 위장취업을 하고 있던 인재근 씨를 만나 결혼하였다. 1980년 신군부 정권이 시작된 뒤 1983년 학생운동 출신들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초대 의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 조종 혐의로 연행된 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3일 동안 이른바 '고문 기술자'인 이근안(李根安)에게 가혹한 전기고문·물고문 등을 당한 뒤 수감되었으며, 이때의 고문 후유증은 남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아내 인재근 씨는 당시 고문 사실을 미국 언론과 인권단체에 폭로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고, 1987년 부부가 공동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이듬해에는 독일 함부르크재단이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였다.

1988년 6월 석방된 뒤 이듬해 1월에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정책기획실장과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90년 1월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출범한 뒤 3당 합당에 대한 반대 시위가 잇따르자 노태우(盧泰愚) 정권은 전민련의 결성 선언문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였고, 집행위원장인 그는 1990년 5월부터 1992년 8월까지 다시 감옥생활을 하였다.

석방 후에도 재야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1995년 9월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한 재야 인사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함으로써 제도권 정치에 들어섰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당선(서울 도봉갑)된 뒤 2000년 열린우리당과 2004년 통합민주당 후보로 내리 3선에 성공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중도 사퇴하였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2004년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2006년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 최고위원과 당 의장 등을 지냈다. 2008년에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으며, 이후 통합민주당 상임고문과 2011년 12월에 출범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지냈다. 2007년 파킨슨병 확진을 받았으며, 2011년 12월 30일 뇌정맥 혈전증으로 치료를 받다가 합병증이 겹쳐 패혈증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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