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감춰진 진시황 그의 감춰진 생애

[코리아데일리 강유미 기자]

진시황은 진(秦)나라의 36대 군주로 장양왕의 아들이며 본명은 정(政). B.C.247년에 부친 장양왕이 서거한 후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초기에는 승상(丞相) 여불위의 보필을 받았으나 장성하면서부터 점차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했다.

▲ 진시황 초상화 (사진 코리아데일리 DB)

중국 역사상 가장 의욕적이고 명민하며 위대한 군주의 한 사람으로서 내로라 하는 문무 관료들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면서 전국 말의 혼란상을 종식시키고 6국을 각개격파하여 마침내 B.C.221년에 중국 역대 황제들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할 만한 천하통일을 달성했던 그는 통일을 이룬 직후 스스로의 공업(功業)을 상고(上古) 황금 시대의 신화적 성군(聖君)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업적과 견줄 만하다고 자부하면서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를 제정하고 '시황제(始皇帝)'라 자칭한 것은 유명한 내용이다.

이어 신흥 진제국(秦帝國)의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전국을 36군(郡)과 1,400여 개의 현(縣)으로 편성하고 각지에 군태수(郡太守)와 현령(縣令)을 파견하여 일찍이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었던 거대 규모의 중앙 집권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문자·화폐·도로·도량형을 통일하고 국론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법가 일변도의 강력한 사상 통제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다.(분서갱유). 또한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전국 시대의 조(趙)·연(燕)·중산(中山) 등이 부분적으로 건축했던 북방의 장성(長城)들을 대대적으로 증축, 신축하여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상당 부분 완성했으며(오늘날의 만리장성은 명대(明代)에 최종 완성된 것임), 황제의 위엄과 권위를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여산릉(麗山陵)과 아방궁(阿房宮) 등을 축조하게 하여 민력을 고갈시키기도 했다.

자신이 이룩한 신흥 통일 제국이 만세(萬世)까지 유지되기를 기원한 나머지 말년에는 신선술과 불로장생술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자연의 섭리만은 정복하지 못해 통일을 이룬 지 불과 11년 만인 B.C.210년에 지방 순수(巡狩) 도중 사망한 그는 고금에 보기 드문 강력한 카리스마와 통치력을 지녔던 진시황이 사망한 후 진제국은 그 업적을 계승할 만한 유능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채 한순간에 와해되어 불과 5년 만인 B.C.206년에 멸망한 비운의 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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