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리. 영화 감상하기전 꼭 알아야할 영화속에 감춰진 클랙식

[코리아데일리 곽인영 기자]

세계 영화사상 최고의 명작으로 곱히는 영화 ‘리플리’는 1999년 윌리엄 호버그(William Horberg)와 톰 스턴버그(Tom Sternberg)가 제작하였다.

원작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1955)로서, 1960년에 르네 클레망이 20세기의 걸작으로 꼽히는 ‘태양은 가득히’로 만든 바 있다. 앤서니 밍겔라(Anthony Minghella)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하였으며, 맷 데이먼(Matt Damon), 귀네스 팰트로(Gwyneth Paltrow), 주드 로(Jude Law) 등이 출연하였고, 상영시간은 137분이다.

리플리 줄거 & 결말은 뉴욕에서 호텔 보이와 피아노조율사로 일하던 톰 리플리(맷 데이먼)는 선박 부호인 그린리프의 눈에 띄어 계약금 1,000달러를 받고 그의 아들인 디키(주드 로)를 이탈리아에서 데려오라는 제의를 받는다.

▲ 영화 리플리 한 장면 (사진 코리아데일리 DB)

리플리는 이탈리아에서 자신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호화스럽게 살고 있는 디키와 그의 여자친구(귀네스 펠트로)를 만나고, 디키의 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배우게 되면서 자신도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계약기간이 만료되고 디키가 자신을 부담스러워 하며 끝내는 돌아가라고 하자, 리플리는 우발적으로 디키를 죽인다. 자기의 재주인 흉내내기, 거짓말, 서명 위조를 이용하여 자신이 디키로 위장하여 그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는 내용으로 로마·나폴리·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촬영하여 고풍스러운 화면이 표현되었다.

영국 출신의 앤서니 밍겔라는 1997년 ‘잉글리시 페이션트 The English Patient’로 아카데미상 9개 부문을 받은 바 있다. 원작을 쓴 미국 텍사스주(州) 출신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재능 있는 리플리 씨’ 이후 ‘플리 언더그라운드’(1970), ‘리플리의 게임’(1974), ‘리플리를 쫓는 소년’(1980), ‘리플리 언더 워터’(1991) 등 5편의 리플리 시리즈를 발표하였다.

2000년 아카데미상에서 남우조연상(주드 로)·각색상·음악상·미술상·의상상 등 5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는 못하였다.

영화속 클랙식은 비록 시대가 바뀌고, 표면적으로 신분의 차이가 없어졌다고 하나 지금도 여전히 출신 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불공정한 현실이 존재한다. 태어날 때부터 출발점이 다르니 어차피 공정한 게임은 불가능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편법을 쓰는 것이다. 그들은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작은 거짓말이 큰 거짓말을 낳고, 이렇게 거짓말을 계속하는 동안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어느새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출세욕은 강하지만 사회적으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통로가 봉쇄되어 있을 때, 사람은 현실에 없는 가공의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서 살게 되는데, 이런 유형의 인격 장애를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리플리 증후군’은 영화 [리플리]의 원작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톰 리플리는 20대 중반의 고아로, 절도와 남 흉내 내기가 특기이며, 어떤 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전형적인 악인이다. 그는 부자 아버지를 둔 덕분에 무위도식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친구를 죽이고 신분을 위조해 그 친구 행세를 하면서 산다. 1960년에 나온 알랑 드롱 주연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는 바로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1999년 작 [리플리] 역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에서 한 실내악단이 베토벤의 [피아노 5중주] E 플랫 장조 작품 16을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리플리는 2층 발코니의 커튼 뒤에서 반쯤 얼굴을 내밀고 무대를 훔쳐본다. 비록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듣고 있지만 객석에 앉아 음악을 듣는 관객과, 커튼 뒤에 서서 음악을 몰래 듣는 리플리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신분의 차이가 있다. 그는 커튼 뒤에서 상류사회의 삶을 훔쳐보는 아웃사이더일 뿐이다.

영화에서 베토벤과 바흐의 음악은 주인공 리플리가 마음껏 향유하고싶어했던 상류사회의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리플리는 관객이 모두 돌아간 텅 빈 연주 홀 무대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을 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뿐. 곧 경비에게 발각되면서 자신의 초라한 현실로 돌아온다.

여기서 베토벤과 바흐의 음악은 상류사회를 상징한다. 피아노 조율사로 일할 때, 이 음악들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커튼 뒤에서 몰래 훔쳐 듣거나, 밤중에 몰래 숨어들어 연주해야 하는, 저 높은 분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간절했는지도 모른다. 디키의 돈으로 멋진 집을 산 그는 제일 먼저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놓는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을 연주한다. 남의 피아노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피아노로. 이것은 그가 그토록 동경하는 상류사회 사람이 되어 이제 온전히 이 음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토벤과 바흐의 음악이 상류사회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 나온 차이콥스키와 비발디의 음악은 리플리가 처한 초라한 현실에 대한 자각 혹은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죄책감을 상징한다.

디키 행세를 하는 리플리는 로마에서 섬유 재벌의 딸 매러디스와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간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이다.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오페라에는 주인공 에프게니 오네긴이 친구인 렌스키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대목이 나온다. 눈 덮인 벌판에서 결투를 벌이기 직전, 젊은 시인 렌스키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듯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내 황금 같은 젊은 날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유명한 테너 아리아이다. 이 노래를 부른 다음, 렌스키는 오네긴의 총에 맞아 눈밭에 쓰러진다. 오네긴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며 리플리는 눈물을 흘리고, 리플리의 죄책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 역시 그의 눈물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난다.

리플리의 초라한 현실이 애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장면은 그가 피터와 이야기를 나누며 피아노로 비발디의 [스타바트 마테르]를 치는 장면이다. 피아노를 치며 리플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창고 열쇠를 주고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라고. 하지만 안 돼. 그 안은

어둡고 더러우니까. 그 추잡함을 들키면 우울한 기분이 더 우울해져. 난 늘 그러고 싶어. 문을

활짝 열고 모든 걸 드러내고 싶다고. 큰 지우개가 있다면 모든 걸 지우고 싶어.“

이 장면에서 나오는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는 중요한 교회음악 양식 중 하나이다. 우리말로 ‘눈물의 성모’ 혹은 ‘슬픔의 성모’라고 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그린 노래이다.

“비탄에 잠긴 어머니 십자가 옆에 눈물 흘리며 서 계셨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고통스럽고 비탄에 찬 그녀의 영혼은 비수에 찔리셨네.

오! 그토록 슬프고 고통스러운 독생자의 어머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떨까. 그 처참한 고통을 그녀는 혼자 감내해야 한다. 그것을 상징하듯 비발디의 음악도 독창자 혼자 ‘고독하게’ 노래한다.

리플리의 피아노 연주는 성당에서의 연주 장면으로 이어진다. 한 소년이 피터의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스타바트 마테르]를 부르고, 리플리는 한없이 고뇌에 찬 표정으로 음악을 듣는다. 음악이 발산하는 애잔함 때문일까. 이 장면에서는 리플리가 피 흘리고 상처 입은 불쌍한 영혼처럼 느껴진다. 소년이 “눈물의 날에”를 의미하는 “라크리모사”를 반복할 때는 그에 대한 연민에 목 놓아 울고 싶은 기분마저 들 정도다.

이 영화는 [태양은 가득히]와 달리 확실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차이콥스키와 비발디의 음악은 리플리의 앞날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정신적인 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와는 달리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에서는 리플리의 살인이 완전범죄로 끝난다. 하이스미스는 리플리를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완전한 악인으로 그렸지만 정의의 이름으로 그를 응징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소설보다 잔인하다. 마지막에 주인공을 파멸로 몰아넣음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인 주제에 감히 상류사회를 넘본 죄가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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