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우 변호사 '원칙의 삶'은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청학 정신

[코리아데일리 이규희 기자]

24일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는 평가를 받은,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거목 김동리 선생이 아들 김평우 변호사의 원칙있는 국가원수를 향한 충정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아들이 그대로 물러 벋은 선생은 웅혼(雄渾)한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에 바탕을 둔 문학 세계를 펼쳐보인 작가다. 그의 문학은 내용적으로는 자연 친화 또는 자연 귀의로 흐르고, 정치적으로는 우익적 민족주의에 기울며, 정신사적으로는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 김동리 선생의 초상화와 아들 김평우 변호사 (사진 코리아데일리 DB)

평론가 이동하 선생은 24일 코리아데일리 전화에서 “한국의 현대 정신사는 ‘동양적·전통적 사회의 문화와 새로운 근대적 서구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한국 전통사회의 문화는 ‘유교와 무교’를 핵심으로 하고, ‘가족주의, 현세 중심주의,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태도’를 그 기본 특징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김동리의 문학 세계는 저의 계급적·지리적·가정적·교육적·심리적 요인 등에 의해 바로 우리 것과 낯선 타자의 문화가 서로 만나 충돌하며 삼투하는 그 지점에 착지한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김평우 변호사의 결단의 목소리는 분명 역사적인 칭송을 들을 만하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 문단의 거목 김동리 선생(이하 김돌이)은 본명이 시종(始鍾)인데, 1913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나이가 마흔두 살로 노산이었다. 젖이 모자라고 밭일이 바쁜 어머니 대신에 아이는 형수가 맡아 암죽으로 키워진다. 암죽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하고 크던 그는 두 살 때부터 아버지가 남긴 술찌끼를 빨아먹는 버릇을 들인다.

이 버릇은 점점 심해져 세 살 무렵에는 취한 나머지 비틀거리며 뒤뜰에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주정뱅이였으며, 김동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1947년에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첫 번째 창작집 ‘무녀도’를 펴내는데, 표제작인 단편 '무녀도'는 김동리의 실제 유년시절의 체험을 반영한 작품이다.

아버지는 술에 젖어 세월을 보냈고, 주사가 심했다. 어머니와 마찰이 잦았는데, 어머니는 부부싸움 끝에 교우인 이웃의 지동댁네로 피신했다. 지동댁네 쪽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려오면 아버지는 “귀신 달아난다!” 하고 고함을 치고, 지동댁은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읍시다!” 하며 더욱 소리를 높이곤 한다. 이것이 '무녀도'에 묘사되어 있다.

김동리는 경주 제일교회의 부설학교인 계남학교에 들어가는데, 공부보다는 방과 뒤 경주 인근 야산이나 들판으로 쏘다니기를 좋아한다. 이런 자연과의 교감 체험은 김동리 문학의 바탕에 깔리는 자연 친화적 정서를 기르는 계기가 된다.

6학년 때 교지에 내놓은 '돛대 없이 배 탄 백 의인'이라는 글 때문에 일경에게 불려가는 곤욕을 치르지만, '글 잘 쓰는 아이'로 소문이 난다. 그는 대구 계성중학을 거쳐 서울 경신고교로 진학하나,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면서 중도에서 학업을 그만둔다. 경신학교 4학년 중퇴가 김동리의 공식 최종학력이다. 정규교육 과정의 궤도를 벗어난 김동리는 철학, 세계문학, 동양고전을 탐독하는 것으로 작가 수업을 대신한다.

이후 김동리가 문학 길로 들어서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독서량을 소화해 낸 것은 한학자이자 철학자인 큰형 김범부의 영향이 크다.

부산에 살던 큰형의 방에는 철학 서적이 천장에 닿도록 쌓여 있었는데, 그는 한동안 그 집에 머물며 종일토록 책에 파묻히곤 한다. 이때 길러진 집중적 독서습관은 경주 집에 돌아와서도지속하여 철도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운다.

1934년 김동리는 신문의 신춘문예 공고를 보고 각 신문사의 상금을 몽땅 타볼 작정으로 한 달 만에 소설 3편, 희곡 2편, 시 3편, 시조 3편을 써서 응모하는 열정을 보였지만 시 '백로'만 ‘조선일보’에 가작으로 뽑히는 데 그쳤다. 고향으로 돌아가 소설 쓰기에 전념해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었다.

이후 1940년까지 그는 '황토기', '잉여설', '찔레꽃' 등을 발표한다. 이즈음 다솔사에서 함께 있던 큰형 범부가 일경에 연행되었다. 당대의 지식인인 김범부는 툭 하면 가택수색이며 예비검속을 당하는 등 수난을 당했다. 그도 일제가 강요한 '문인보국회'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며 그가 몸담고 있던 광명학원은 폐쇄당한다.

일제의 강제로 ‘문장’ 등의 문예지가 폐간되고는 사실상 작품 활동을 접어버렸다. 절망한 나머지 그는 동네 건달들과 어울리며 술과 노름, 유행가, 화투, 장기와 같은 잡기에 휩쓸린 채 반년을 보낸다. 이 무렵에 함양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김월계와 결혼해서 낳은 장남 진홍이를 병으로 잃는 불운을 겪는다.

1943년 김동리는 조카의 주선으로 사천의 양곡 배급소 서기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는다. 해방 뒤 서울 돈암동에 정착한 그는 1946년 조지훈, 조연현, 황순원, 최인욱, 박두진, 박목월, 서정주, 김달진 등과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으로 선임된다. 해방 전후 문단에서는 임화와 김남천 등에 의해 조직된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이기영과 한설야 등에 의해 세워진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그리고 두 단체가 통합된 문학가동맹이 한 축을 형성한다.

김동리는 이런 좌익 문학세력에 맞서는 우익 문학 진영의 대표를 자임했다. 우익 문학세력을 규합해 청년문학가협회 결성을 주도한 그는 좌파 논객들과의 문학논쟁도 피하지 않는다. 그는 본디 소설로 문단에 나왔지만, 순수문학 논쟁을 비롯한 갖가지 논쟁 때 다른 어떤 비평가 못지않게 자신의 뜻을 확고하게 표명해 이론가로서도 만만치 않은 면모를 보인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 그는 ‘경향신문’의 문화부장과 ‘민국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언론계에 몸을 담은 채 꾸준히 작품을 내놓는데 해방 직후의 귀환과 더불어 집 없는 사람의 애환을 다루는 등 현실 문제를 들추는 변모를 보였다. 하지만 '역마' 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사주(四柱), 무속(巫俗), 불교, 기독교 등과 관련해 인간의 근원적 삶을 탐구하는 본디의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1949년 김동리는 두 번째 창작집 ‘황토기’를 펴내고, 창간된 ‘문예’의 주간을 맡는다.

이 무렵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다방 '모나리자'에서 그는 '모나리자'의 주인이자 신인 작가인 손소희와 처음 만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그를 손소희가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겨주면서 두 사람 사이는 급속히 가까워진다. 1·4후퇴 때는 부산에 가서 지내며 문인들의 집결지 구실을 하던 광복동의 다방 '밀다원'에서 많은 일화를 만드는데, 나중에 '밀다원시대'에 생생하게 재현된다.

김동리가 같은 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점은 일제강점기와 전쟁 때 겪은 가난 또는 고통을 소재로 사용하되 이를 사회 또는 제도의 탓으로 돌리거나 미래를 위해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식으로 전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한결 근원적인,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운명적 인간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나간다. 그러나 바로 이 운명성 때문에 김동리의 소설은 현실에서 구원을 찾을 수 없다는 식의 허무주의 징후를 보이며, 삶을 신화나 주술의 세계에 의탁함으로써 도피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을 산다.

1953년 서울로 돌아온 김동리는 서라벌예대에 출강하는 한편 손소희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불륜'이라는 비난이 높았다.

1954년에는 예술원 창립회원이 되고 한국유네스코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한다. 1955년 그는 한국전쟁 체험과 연관된 현실적 색채가 깃들인 '흥남 철수'를 발표한 데 이어 창작집 [실존무]를 펴냈다. 1957년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를 발간해 이듬해 예술원상을 받고, 1961년에는 한국문인협회의 부이사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며 창작집 ‘등신불’을 펴낸다.

1968년에 그는 ‘월간문학’을 창간하고 1970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72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한다. 일흔다섯 나이에도 장편소설 ‘자유의 역사’와 수필집 ‘사랑의 샘은 곳마다 솟고’를 펴내는 등 그는 평생에 걸쳐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작품을 쏟아낸다.

그러나 창작욕을 과시하던 김동리는 1990년 7월 30일 돌연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오랜 투병 끝에 1995년 숨을 거둔 원칙의 삶을 아들 김평우 변호사는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코리아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