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남 범행 모의자 자카르타 통해 증발

[코리아데일리 심민재 기자]

김정남 피살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북한 남성 4명 가운데 3명이 사건 당일 인도네시아로 도주해 자카르타 공항을 출국하는 장면이 공항 CCTV에 잡혀 눈길을 끌고 있다.

이는 일본 NHK가 입수해 공개한 영상에서 두바이 등을 거쳐 평양으로 귀국한 이들은 마치 관광객을 가장한 듯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 또 하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영상을 보면 범행 용의자로 지목된 북한 남성 4명 가운데 3명이 들어서는ㅁ ㅗ습과 함께 ㅣ들은 이미 신원이 공개된 리지현, 홍송학, 리재남 등 세 명으로 보인다.

▲ 자카르타의 시가지 (사진 코리아데일리 DB)

편한 옷차림에 각자 똑같은 여행용 가방을 끌고 항공사 카운터에서 출국수속을 진행한 후 관광객을 가장한 듯 활짝 웃는 표정으로 서로 여유있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따로 짐을 맡기지 않은 채 직접 가방을 끌고 출국심사대 입구로 들어간 이들은 사건이 난 지 불과 50분만인 오전 9시 50분 쿠알라룸프르 공항을 떠나 자카르타로 간 것으로 추저이 된다.

한편 인도네시아 공항 당국은 이들이 사건 당일 저녁 두바이로 출국한 사실을 확인했고 미리 항공권을 준비하는 등 치밀한 계획하에 자카르타와 두바이,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평양으로 귀국한 것으로 보여 충격을 주고 있다.

이처럼 주목을 받는 자카르타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시대(1949)에는 바타비아라고 하였다. 동남아시아 제1의 대도시이며, 행정상 ‘대(大) 자카르타 수도 특별지구’를 형성한다. 시가는 북쪽의 리웅강(江) 하구에서 남쪽으로 약 25km에 걸쳐 뻗으며, 해발고도는 낮아 도심에 있는 기상대 자리가 8m이다.

연평균기온은 26.9 ℃로 연교차가 1 ℃에 불과하며, 1월과 2월에는 20 ℃ 이하가 되는 날도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1,755mm로 2/3는 12∼4월의 우기에 집중하며, 저지대에서는 홍수를 일으키기 쉽다. 습도는 1년 내내 높다.

자카르타는 16세기 경에는 서부 자바의 파자자란 왕국의 영토였으며, 당시 리웅강 하구에는 특산물인 야자(칼라파) 열매를 적출하는 순다 칼라파라고 하는 항구가 있었다. 이 항구는 1527년 서(西)자바의 강력한 이슬람교국 반탐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자야카르타(Jayakarta:승리의 도시)라고 개명되었다.

16세기 말 자바에 진출한 네덜란드인은 지리적 위치가 뛰어난 점에 주목하였다가, 마침내 초대 동인도 총독 쿤(Coen)은 리웅강 하구에 성채를 건설하고 운하를 만들어 시가를 건설하였으며, 지명도 바타비아라 명명하여 동인도 제도에서의 네덜란드 식민 세력을 위한 최대 거점으로 삼았다.

그 후로 이곳은 군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였으며, 19세기에는 시가가 차차 남쪽으로 확대되고, 리웅강 하구의 동쪽에는 탄중프리오크가 근대적 설비를 갖춘 외항으로서 건설되었다. 자카르타는 산업적으로는 거대한 소비도시지만, 근교에 외국자본의 원조에 의한 방직·식품·전기기계·약품 등의 근대공업이 일어나고 있다.

또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한 육·해·공의 교통로도 잘 정비되어 동남아시아의 일대 중심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무역의 절반은 자카르타를 통하여 행해진다.

자카르타는 또한 문화의 중심이며, 인도네시아대학을 비롯하여 각종 학교와 연구기관이 있다. 시는 관광대상이 많으며, 대통령 관저·독립광장·높이 137m의 독립기념관(꼭대기는 35 kg의 순금으로 된 불꽃 모양을 이루고 있음)·구(舊)바타비아성의 유적·박물관·어시장·공화국 방송국·영웅묘지와, 하구 근처의 구시가지, 전후에 만든 남부의 크바요란새 주택지, 10만 명을 수용하는 근대적 경기장, 남동 16 km 지점에 신설된 라그난 동물원, 남쪽 60 km 지점에 있는 보고르 식물원, 이슬람교 사원과 로마가톨릭 성당 및 개신교 교회(17세기) 등을 볼 수 있다.

자카르타는 동남아시아의 전형적 복합도시이며, 주민의 종족 구성은 역사적으로 복잡하다. 외래민족인 유럽인·중국인·아랍인·인도인 등 외에 섬에 따라 언어와 문화를 달리하는 말레이계 각 부족이 내주(來住)하여 저마다 집단거주지를 형성하였다. 또 이들은 도시기능과 결부되어 하구 부근의 저지에는 상업 지구, 남쪽에는 정치·문교교육 지구 및 주택 지구가 전개되는데, 한길의 근대적 도시경관과는 대조적으로 뒷길에는 원주민이 밀집 거주하는 농촌적 경관을 보이며, 양쪽 사이에는 생활 수준의 격차도 현저하다. 또한 전후의 폭발적인 인구증가(1944년 말의 인구는 85만)는 시민의 생활격차를 더욱 조장하였다. 수카르노 정권 이후 시가의 근대화에 주력하여 도심부와 새 주택 지역에서는 건물과 도로가 새롭게 건설되었으나 시 전체에는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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