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동 성당 비와 김태희 결혼 특별함 속에서 행복 기원

[코리아데일리 이경미 기자]

가회동 성당이 19일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가회동 상당은 퇴근길 회사 근처나 주말 오후 동네 찾아갈 수 있는 그런 곳이다.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이나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역사와 문화가 깃든 동네 성당은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도심이나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국내 성당 역사는 독특하다. 지식인들의 자발적 학습이 선교에 우선했다. 1800년대 이후 자생적으로 확산되며 박해의 역사로 이 땅에 뿌리내린 천주교의 성당은 이야기를 품은 공간을 곳곳에 남겨뒀다. 천주교서울대교구와 함께 서울 도심에 숨어 있는 동네 성당들을 소개한다.

▲ 가회동 성당 (사진 코리아데일리 DB)

가회동 성당은 서울 종로구 북촌에 있다. 건축미가 돋보이는 곳이다. 지난해 서울시 건축상 일반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서울시는 당시 시민들이 직접 투표해 꼽는 ‘시민공감 건축상’을 처음으로 마련했는데 가회동 성당은 8개 후보작 가운데 약 40%(1283표)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그렇다고 화려한 멋을 자랑하지는 않는다. 소박하다. 도로 쪽에 한옥이 있다. 안에 들어가면 숨어있던 성전과 사제관 양옥이 나온다. 19일 이곳이 주목을 받는 것은 가수 비와 배우 김태희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한옥과 양옥이 조화를 이루며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선비와 벽안의 외국인 신부가 어깨동무하는 형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주 출입구에 있는 배롱나무 옆 김대건 신부 동상이나 마당 안에서 볼 수 있는 지붕 십자가가 없다면 성당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북촌 복판에 있는 가회동 성당이 주는 편안함은 한옥에 있다.

언뜻 사찰을 떠올릴 정도다. 원래 성당으로 사용했던 한옥은 한국전쟁 중에 인민일보 사옥으로도 사용됐다. 인민군 철수한 뒤에는 초토화됐다고 한다. 전쟁 뒤 주한미군민간원조단(AFAK) 원조로 시멘트 성당 건물을 새로 지었다.

이후 2010년 18대 송차선 신부와 신자들이 성당을 재건축했다. 전국을 뒤져 국산 적송을 찾아 한옥도 지었다. 2013년 11월 한옥이 주는 고유한 정서와 현대식 건물이 조화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성당 옥상은 북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명당이다. 남쪽으로 남산을 배경으로 한 강북 일대의 스카이라인이 보인다.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북촌 한옥 지붕을 앞세운 마을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겉모습과 달리 가회동 성당에는 여름 장마와 태풍 맞으며 붉어진 가을 대추처럼 박해와 상처가 아문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1700년대 후반 조선 지식인 일부는 중국에서 구해온 천주교 서적을 연구했다. 그 중심지가 북촌이다. 이후 중국 북경교구에서 온 신부가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았다. 주문모 신부(1752~1801)다. 주 신부는 1795년 4월5일 부활대축일에 정약종, 황사영 등 초기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조선 첫 미사를 올렸다. 박해 속에서도 북촌을 찾아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이들이 수 천명에 달했다.

하지만 밀고와 수배령이 내려졌다. 주 신부를 포함해 북촌 일대에서 활동한 초기 천주교 지도자 대부분이 을묘박해(1795)와 기묘박해(1879) 사이에 순교했다. 가회동 성당은 초대 교회의 사적지이자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이들의 역사가 담긴 곳이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십자가 위치도 박해를 받던 시절 숨어서 예배하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역사는 성당 역사전시실에 기록돼 있다.

전통 한옥카페와 예식도 운영하는 가회동성당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엮은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 제2코스의 출발지다. 최근에는 천주교 신자는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도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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