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은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명칭 137건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자 변경 예고했다고 27일 밝혔다.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명칭 조정안은 해당 민속문화재의 명칭을 국민 누구나 더욱 알기 쉽도록 특별시‧광역시와 특별자치시‧도, 시·군·구 소재지를 사용하도록 했고, 문화재 성격에 따라서 ‘종택’ ‘고택’ ‘생가’ ‘재사’(제사를 위해 묘소 옆에 지은 집) 등을 부여해 문화재가 쉽게 식별될 수 있도록 했다.

또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당시 소유자의 이름으로 부여된 명칭의 경우에는 족보, 상량문 등 고증자료를 확인해 고택과 관련된 역사적 주요 인물을 찾아 그 사람이 머물렀던 거처 이름인 당호(堂號), 이름을 대신해 불렀던 호, 출신 지명이나 관직명 등을 사용해 불렀던 택호(宅號), 그 사람의 성명 등을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고택의 역사성이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했다.

역사적 주요 인물을 찾기가 곤란한 경우에는 그 집의 건축적 특징과 사용됐던 용도를 찾아서 명칭을 부여했는데, 대나무 서까래를 사용한 순천 낙안읍성 대나무 서까래집, 고택이 고을의 대장간으로 사용됐던 제주 성읍마을 대장간집 등이 그 예이다.

▲ 이제부터는 ‘경주 교동 최씨 고택’에서 ‘경주 최부자댁’으로 고쳐 불린다.코리아데일리 DB

이제부터는 ‘경주 교동 최씨 고택’에서 ‘경주 최부자댁’으로 고쳐 불린다.

한편 경주 최 부자는 12대 400년동안 만석꾼의 부를 이어오면서 9대 진사를 배출한 현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로 책으로도 소개되면서 주목받고 있다.

‘경주 최부자집’은 최치원의 17세손이며 조선시대 경주지방에서 가문을 일으킨 정무공 최진립에서부터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바쳐 영남대를 설립한 최준에 이르는 12대를 말한다.

그는 부산에서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 많은 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그 결과 회사는 어려워지고 부채를 사장인 자신이 몽땅 떠안았다. 일제는 여러 벼슬을 제시하며 갖은 방법으로 유혹했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다.

해방을 맞이하고 그는 나라가 망한 것이 부족한 교육 때문임을 깨닫고 400년 묵은 그의 재산을 던져 영남대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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