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주목 받는 역사 사랑이야기

[코리아데일리 정은채 기자]

20일 SBS에서 방영하는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가 방영 주목을 받으면서 세기의 사랑으로 역사속에 자주 등장하는 고려 광종의 러브스토리가 주목을 받고 있다.

드라마의 주된 내용은 고려 태조 이후 황권 경쟁 한복판에 서는 황자들과 고려 소녀 해수로 들어간 현대 여인 고하진 사이에 벌어지는 궁중암투와 사랑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가 되면서 국내 방송의 역사물을 새롭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 이준기가 맡은 역할은 ‘왕소’라는 인물이지만 그는 후에 고려의 역사를 새롭게 재 탄생시킨 고려 4대왕이 되는 광종이다.

▲ 고려 광종의 일대기를 그린 MBC TV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 스틸

드라마와 실제적인 역사는 다르지만 ‘달의 연인’에는 아이유가 분한 ‘해수’는 8번째 왕자 왕욱의 아내 ‘해씨’의 육촌동생이기에 Eh 다른 역사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국내 드라마에서 고려 광종의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거 보면 그의 삶 자체는 실제 드라마틱하게 평생을 살아왔기에 역사의 러브스토리와 역사속에 공포정치라는 또 다른 평가를 받는 인생 자체가 흥미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속에 두 가지로 평가를 받는 고려 광종은 재위기간 노비안검법,과거제도,관복제정을 통해 왕권강화와 고려의 기초를 정비한 왕이다.

또 한 이로 인해 많은 호족들과 왕족을 제거함으로써 피의 군주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고려를 개국할 때 태조 왕건은 전국에 호족의 힘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개국공신이 무려 3,000여명이 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태조 왕건 사후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종은 정종의 친아우이며 태조의 세번째 왕후인 신명순왕후 유씨의 아들이다. 어머니인 신명순왕후는 충주를 기반으로 하는호족 유긍달의 딸이기도 하다.

충주를 외가로 둔 광종은 형인 광종보다 정치적 기반이 좋았다. 그 이유는 광종의 첫째 부인인 대목왕후 황보씨는 신정왕태후와 태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광종은 이복누이와 결혼한 것입니다. 고려초 가장 강력한 호족인 충주세력(외가)과 황주세력(처가)을 얻음으로써 든든한 배경을 두게 된다.

두 번째 부인은 경화궁 임씨로써 2대왕 혜종의 딸이다. 왕실 족내혼을 한 첫 번쨰 왕이다.

고려왕실의 족내혼은 신라왕실의 족내혼 풍습과 같은 것으로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왕권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했다.

광종은 25살이 되던해에 즉위하였고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호족들에 의한 왕위쟁탈전을 몸소 보고 느껴기 떄문에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호족들의 권한과 제거를 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 고려사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광종은 즉위하면서 덕을 밝게 비춘다는 뜻의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선포하고 대내외적으로 고려를 황제국으로 선포하는 데 그 이면에는 왕위계승의 정통성과 왕권강화라는 목적과 함께 왕권강화를 위한 호족과의 전면전을 예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호족과의 첫번째 전면전은 956년(광종7년) 노비 해방에 가까운 '노비안검법'시행이었다.

그 당시 호족들이 소유한 사노비는 주로 전쟁포로,가난한 양민출신들이 많았고 노비안검법은 노비의 신분을 조사해서 전에 양민이었던 자들은 다시 양인으로 만들어주는 조치이다,

그래서 귀족세력인 호족들의 힘을 누르고 왕권의 강화를 하고자 하였으나 호족세력의 반발은 엄청나게 심하였고 광종의 정비인 대목왕후 황보씨조차도 반대를 하였으나 광종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시행했다.

그리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가 958년 광종 9년에 과거제도의 시행을 건의했다. 과거제도는 노비안검법보다 귀족들에게는 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과거제도 시행전에는 고려도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통한 것이 아니라 집안의 배경이었다. 그래서 기득권층인 귀족세력은 대대로 권력을 누렸기 때문에 광종은 과거제도의 시행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임으로써 권력구조를 개편하여 왕권강화을 꾀 할 수 있었다.

물론 호족들의 반발은 거세었지만 광종은 따르지 않는 호족들은 모두 감옥에 가둘 정도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제도 시행 2년 후에는 관복을 제정함으로써 위계질서를 잡게 된다.

그 전까지는 별도의 관복을 제정하지 않다보니 신화들이 입궐시 입는 예복이 왕보다도 화려한 경우가 허다하여 왕의 권위가 서지 않는 경우가 있어 이를 바로잡기위해 신화들의 예복을 네가지 색깔로 직위를 구분 할 수 있도록 관복을 정하게 된 것.

이와함께 광종의 재위기간을 정리해보자면 약한 왕권을 가진 혜종과 정종이 공신세력에 의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본 광종은 그전의 왕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공신세력을 축출하여 왕권강화에 힘쓰고 왕조의 기틀을 만들고 조금 과하다 할 정도의 기득권세력 숙청작업을 한 왕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광종은 피의 군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여인네들과의 세기의 러브스토리가 더 구전으로 내려오는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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