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A 밤 11시 ‘어메이징 스토리’서 재조명된 ‘두 올케의 궁중암투’

[코리아데일리 정은채 기자]

채널A 밤 11시 ‘어메이징 스토리’서 재조명된 ‘두 올케의 궁중암투’로 방영된 효명옹주의 ‘파란만장한 삶’ 창살없는 감옥서 산 눈물의 64세월이 역사학자 사이에 재조명되고 있다.

효명옹주의 본관은 전주(全州). 인조의 서녀이며, 어머니는 귀인(貴人) 조씨(趙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라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1647년(인조 25) 옹주 책봉과 함께 반정공신 김자점(金自點)의 손자 세룡(世龍)과 혼인하여 행복한 시절을 누렸다. 그러나 후에 작위가 삭탈되어 '김세룡의 처'로만 불린 비운의 공주였다.

▲ 비운의 삶을 살다가 떠난 효명 옹주 (사진출처=효명옹주의 삶을 다룬 드라마의 한 장면)
이처럼 비운의 옹주가 된 것은 신랑감을 간택하게 했는데 귀인 조씨는 딸을 세도가인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과 혼인시키기 위해 김자점의 동의 하에 김세룡의 사주팔자를 조작했고 그 결과 김세룡은 옹주의 부마로 선발되는 천운을 어긴 죄로 후에 비운의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정사에 의하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효명옹주는 자기중심적이고 행동이 방자했는데 궐 안에 잔치가 벌어지자 이복오라비 인평대군의 처인 복천부부인 오 씨와 누가 윗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 인조는 옹주의 편을 들어 딸이 윗자리에 앉도록 했는데 이 일 이후로 옹주와 인평대군 부부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옹주의 혼례 때 인평대군은 저주의 뜻이 담긴 베개를 들여보내기도 하는 등 ‘두 올케의 궁중암투’속에 한시도 마음 편할 일이 없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옹주의 삶을 안타깝게 한 인조는 1649년에야 비로소 출궁하여 사가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인조 사후 1651년 귀인 조씨가 장렬왕후와 효종을 저주한 일에 관해 여종들을 추국할 때 효명옹주가 옷소매 속에다 사람의 뼈가루를 담아서 대궐과 이복오라비인 인평대군의 집에다 뿌리고 흉한 물건을 궁궐 주변에 묻었다는 자백이 나왔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확인이 안 된 일이다.

그러나 야사에서 효명옹주와 남편 김세룡을 국문하라고 요청했으나 효종은 김세룡만 국문하였다. 남편 김세룡, 시조부 김자점이 사형당하자 작위를 박탈당하고 김처(김세룡의 처)라 불리게 된 것은 사실이다.

잉대해서 야사가 전하는 내용을 좀더 살펴보면 효명옹주는 1651년(효종 2)김자점이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처형되고 일가가 적몰되자, 귀인 조씨의 간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친 며느리인 숭선군 징의 부인 신씨를 모해하는 데 동조하여 종을 시켜 갖은 악독한 일을 저지른 것이 탄로나서 폐서인의 처분을 받고 진도에 유배되는 우명을 맞이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 비운의 삶을 산 효명 옹주 (사진은 드라마의 한 장면)
얼마 뒤 다시 통천에 안치되고, 이듬해 경기도 이천에 이배되어 위리 안치되었다. 효종의 지극한 우애에 힘입어 죄인의 몸이면서도 몸이 아플 때는 의약품이 하사되었고 철이 바뀔 때마다 의복도 하사되었다. 1658년 효종의 특명으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으나, 복호되지는 못하였다.

오직 그녀의 마음속에는 비명으로 삶을 마감한 지아비에 있었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그녀의 사랑에 대한 정은 다 깊어갔다.

그러나 옹주는 평생을 왕족의 감시속에 살다가 1700년(숙종26) 64세의 나이에 비운의 삶을 마감하게 된 조선왕조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떠난 안타까운 옹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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