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시대가 낳은 이 땅의 돈키호테 된 지평의 삶

[코리아데일리 강도현 기자]

19일 주목을 받는 지만원 박사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가치도 사실 없는 사람이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그의 진실 된 삶속에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국민을 위한 희생을 삶을 사려는 철학을 가진 멋진 애국가의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지만원 씨를 알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지만원 박사는 혈혈단신으로 5.18단체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그의 전쟁은 표면적으로 5.18 광수들에 관한 문제이지만 실제적으로는 5.18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의 문제이다” 면서 “현재 국가의 정통성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좌익과 우익, 대한민국 애국세력과 종북세력 간의 전쟁의 희생양이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 지만원 박사 (사진출처=지만원 트위터)
이에 앞서 이론적인 면에서 지만원 박사는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광주를 비롯한 야권의 정치권은 물론이고 수 많은 단체들은 탄원서를 제출하여 5.18 측을 응원하고 있지만 그를 잘 아는 보수측의 인사들은 “이 것은 지만원 박사의 개인적인 전쟁이 아니며 국가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한 보수우파의 전쟁이며, 허위와 위선에 대항하는 우리 모두의 전쟁이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와 같이 보수외 진보의 그과 극이 다른 평가를 받는 지만원 박사는 군인출신으로 군사평론가, 사회기관단체 대표다. 육군사관학교를 22기로 졸업,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고 1987년 육군사관학교에서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군인 시절에는 1967년부터 1971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고, 1977년부터 1981년까지는 미국 해군대학원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국방연구소 연구원 시절에는 율곡 사업 중 방공자동화사업의 문제점과 부품의 결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미국 해군대학원 부교수,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을 역임했다.

정치 경력으로는 시스템미래당 대표로 활동하였고, 1990년부터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 소장, 시스템클럽의 대표, 대한민국대청소 오백만야전군의 의장 등을 맡고 있으며, 언론활동도 하고 있다. 교육 경력으로는 USNPS 부교수, 인하대학교 교수, 경희대 겸임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지만원 박사는 1942년 12월 27일 강원도 횡성군에서 태어났다. 동생만은 교육을 시켜야 된다는 넷째 형의 노력으로 횡성군 일신국민학교(현 일신초등학교)에 입학, 그 뒤 일신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면사무소 소재지 인근에 있던 지제중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 학교를 중퇴했으며 형들을 따라 서울로 이주, 서울 동대문구 장안평에서 독방을 얻어 노동일을 하는 큰 형 집에 머무르며 신문도 배달하고, 철판을 두드려 자동차를 만드는 이른바 서비스공장도 다니고, 건설현장에 가서 여러 가지 일을 하기도 했다. 그 뒤 서울 고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3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했다.

그 뒤 용두동에 소재해 있던 서울 한영중학교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받고, 서울 한영고 야간반 과정에 입학했으며 1961년 한영고 야간반 과정을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는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지망했지만 성적 미달로 떨어졌다.[2] 그 뒤 고전소설, 위인전, 영웅전, 사상계 등 잡지로 나날을 보냈다.

1961년 가을 육군병원 신체검사에서 키가 작다는 이유로 불합격할 뻔하였으나 기적적으로 통과, 육군사관학교의 입학 할 수 있었다.

1967년 ~ 1971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백마부대 포병연대에 배속되었으며, 중위 재직 중 포병 대대 포병화력을 담당하는 사격지휘담당장교, 사격통제담당장교로 보임되었다.

1969년 9월 1일 (임)대위로 진급했으나 다시 베트남 전쟁에 출전, 사이공 파월한국군 사령부 전속부관이 되었다. 이후 대위로 재임 중 포병연대 관측장교, 화력지휘담당장교, 작전장교, 월남군청연락장교, 포대장(중대급) 등을 역임하고 1971년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육군대학 전략정보과정(1년)을 수료하였다.

이후 육군 제9보병사단(9사단) 제52포병대대 제2포대장, 1972년~1974년 합참정보국(현, 정보본부) 해외정보 수집담당장교, 1976년~1977년 국방 PPBS 도입 연구요원 등을 역임하고 1977년부터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다.

장교로 복무하던 중 미국으로 유학, 수학의 기초과정부터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해군대학원(Naval Postgraduate School)에서 행정과학(Administrative Science) 석사과정(1974년~1975년)을 마치고 1975년 미국 해군대학원 행정과학석사를 받았다.

대령으로 복무 중 1985년 정부의 지시로 율곡사업 10년을 평가하던 중 방공자동화사업이 돈 낭비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방공자동화사업 담당자와 발주 업체 관계자들을 만난 그는 부품에 하자가 있음을 밝혀내고 이를 보고하였다. 이로 인해 국방부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불려가 호된 질책을 당했고, 국방차관, 국방부 기획실장 등이 그를 국방연구원에서 축출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지만원 박사는 정신적인 생각과 몸은 온통 국가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이땅의 진정한 보수 논객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코리아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