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얽힌 5.18 그날의 비극 100분 토론 주목받는 이유?

[코리아데일리 이옥희 기자]

조선일보 주필을 역임한 조갑제 씨는 우파 언론인으로 유명하다.

27일 100분 토롬에서 유승민 의원의 새누리당 복당에 대해서 나름대로 견해를 밝힌 이후 주목을 받는 조갑제 씨는 평생을 기자 정신으로 살아온 이 땅에 몇안되는 지식인이다.

이러한 조갑제 기자는 5.18 당시 현장을 취재한 기자로  당시의 참상을 누구보다 신속하게 보도한 장본인이다.

▲ 조갑제 기자 (사진=뉴스1)
조갑제 기자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민주화운동’이라 평가 했고,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북한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한 탈북자 단체 및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이 조갑제를 비난하는 등의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광주시민 수십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기자 수백 명들이 취재한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5·18을 취재했던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었다.

전국 비상계엄령으로 해안과 항만이 철저히 봉쇄됐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확인했을 것이다.

대대 규모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무장시민에 의한 국군 사망자가 7명에 그쳤을리 없다. 탈북자 증언은 전언에 불과하며,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김일성이 5월 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를 투입했다고 해도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5월 20일 이후일 것인데, 5월 20일부터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됐고 밝혀 누구보다 그 당시의 현장을 생생히 보도한 것이 27일 재조명을 받고 있다.

한편 조갑제 기자는 매일 하루 3~4건의 기사를 써 조갑제닷컴에 올리고 다른 곳에 기고도 하는 현역 기자다. 한 달에 200자 원고지 600장, 1년에 7200장의 원고를 쓴다. ‘이회창 쇼크’란 책은 1000장 분량을 한 달 만에 썼다. 1945년 청도 출생으로 수산대를 중퇴하고 부산 국제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마산만 어패류 오염사건, 포항 영일만 석유사건, 중금속 오염실태 등 계속되는 특종기사로 제7회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다 두 차례 강제해직 당했다. 신문을 떠난 뒤에는 ‘마당’과 ‘월간조선’ 잡지사로 옮겨 활약했다. 당시는 월간 등 시사잡지의 황금기였다. 정권 비화는 물론 마약중독의 실태를 다룬 코리아커넥션, 이수근 간첩사건 등의 발굴기사를 썼고, 87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인터뷰가 실린 월간조선은 40만부가 판매되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인간 박정희를 취재하던 중 그에 매료되어 ‘죽은 박정희의 망령을 무덤에서 부활시켰다’는 비판도 받는다. 또 1986년 ‘한국 내 미국 CIA의 내막’이란 기사 때문에 안기부의 조사를 받다 정형근 의원과 만난 뒤 철저한 반공주의자, 안티김일성·김정일주의자로 변모했다.

1991년부터 2004년까지 13년간 월간조선 편집장을 지냈으며, 조선일보를 떠나 현재 조갑제닷컴 출판사와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여행사 상미회 이사로 해외여행을 하며 여행기도 쓰고 있다. 가장 가까운 친구 정순태씨는 한 인터뷰에서 “37년을 사귀었지만 솔직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단 한 번도 취한 모습, 화를 내며 감정을 폭발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소곤소곤 대화하는 것만 즐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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