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금실, “영혼 팔아먹은 인간들” 야당지도부 향해 돌직구

[코리아데일리 이규희 기자]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트위터에 “망하려면 곱게 망하라” 글 올렸다 삭제하는 등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돌직구 날렸다.

22일 강 전 장관은 자신의 트위터에 “민주당, 망하려면 곱게 망하라는 오래된 교훈이 있다”며 “미치려면 곱게 미치든가 마음으론 이미 탈당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아무리 금배지가 좋다 한들 당을 그렇게 통째로 내주고 싶냐”며 “영혼을 팔아먹은 인간들”이라고 덧붙여 내홍을 겪는 더불어민주당을 겨냥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해 정치권을 술렁이게 만들고 있다

▲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이 같은 내용이 알려지자 한 야당 인사는 “최근 정청래 의원을 공천에서 컷 오프 시키는 등 헛 소문이 나도는 등 구설수에 오른 박영선 의원 향했다는 말이 더민주당 내에 나돌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확인을 할 수 없는 내용이다”면서 “그러나 최근 더민주당의 공천권을 행사한 지도부를 향한 독설인 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파문이 확산되자 강 전 장관은 글을 삭제해 현재 볼 수 없다.

한편 정치권의 야당 계의 미녀로 주목을 받는 강금실 전 장관은 1957년 경주에서 2남 4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선시대부터 전라도 지역에서 공직자를 대대로 지내 온 아버지 대에서는 형제와 할아버지대의 사고와 사망이 이어져 할머니는 깊이 불교에 심취, 제주도 관음사의 초대 신도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살다 경주로 이사 와 강금실은 경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터 입 바른 소리 잘하기로 유명한 금실은, 서너살 때 큰 오빠가 결혼해서 색시와 집에 놀러를 왔는데, 어린 금실이 가서 올케의 수저를 빼앗고 밥은 너희집에 가서 먹으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었다고 전한다.

홍난파 관현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아버지는 음악으로 유학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가족들 생각에 다시 서울에서 교편을 잡으셨고, 다 같이 서울로 올라와 강금실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약국집 셋째 딸이었던 어머니는 똑똑하고 말 잘하기로 유명했다. 부부싸움을 할 때면 말 잘하는 어머니가 지는 일은 많지 않았고 할말이 없어진 아버지가 초등학교졸업밖에 못한 엄마를 두고 무식하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47세, 어머니가 40세에 태어난 막내 금실은 큰언니나 오빠들이 학교에 데리고 다닌 일도 많았다고 한다. 가난했던 금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어머니마저 아프셔서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비지죽만 먹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삼양라면이 처음 나왔고 좌석버스를 그 때 처음 보았다고 고백한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 수줍음이 너무 많아 교실에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게 쑥스러워서 그만 교실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던 때도 있고, 학예회에서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데, 2절 가사를 다 못 외서 급하게 외웠지만 무대에서는 다 부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내려왔던 기억이 있다고 전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4번이나 이사를 다녔던 강금실은 2학년 때 전학 후, 4학년 때 천연동국민학교에, 다시 금화국민학교로 전학한 뒤 아현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게 된다.

▲ 강금실 전 장관 트위터에 오른 글
초등학교 시절은 가난했지만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었고 졸업할 때는 반장으로 졸업했다.

한편 강금실의 아버지 강계돈(康季敦)씨는 용공조작 사건으로 유명한 '유지(有志) 사건'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알려져 있다. 유지 사건은 1950년 8월 초순 제주지역 법원장, 검사장, 변호사, 사업가, 교육자, 제주읍장 등 16명의 지역유지급 인사들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는 혐의로 제주지역 계엄사령부로 연행된 대표적 사건이다.

당시 제주농업고등학교 교감이었던 강계돈은 무고 혐의로 구속되어 1951년 4월에 열린 부산지방법원 공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가 1951년 11월 대구고등법원에 항소한 끝에 1952년 1월 15일 무죄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훗날 계엄사령부(제주도 해병대 정보참모실)가 용공조작한 사건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강금실의 가족은 제주도를 떠나 육지에 나가게 되었다.[2]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1993년 제3차 사법파동에 참여하여 소장 판사들과 함께 사법부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대법원장에게 전달하였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끝으로 판사직에서 물러났고 1996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 변호사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2003년 참여정부에서 제55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개혁적인 업무 추진과 발랄한 언사로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또 꼭짓점 댄스를 잘 춰 '강효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열린우리당 측의 출마 권유가 있었으나 물리치고 장관직을 계속 수행했다.

법무부 장관 사직 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6년 제4회 지방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서울 시장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의 오세훈 후보에 밀려 낙선했지만 항상 야당 정치권에 중심에 서 있는 정치인이다
서울 시장 낙선 후 정계를 잠시 떠나 법무법인 ‘우일아이비씨’의 고문 변호사 겸 외교통상부 여성인권대사로 활동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및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각각 통합신당과 통합민주당의 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법무법인 원의 구성원 변호사로, 한국인권재단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최문순이 제37대 강원도지사로 선출되는 데 기여했다.

법무법인 원 고문 변호사로서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해당 로펌이 제주도에서 공익적 법률서비스를 펼치고자 제주 분사무소를 개소하면서 활동 영역을 제주도로 확장하였다. 강금실은 제주도변호사회 회장을 맡고 있는 문성윤 변호사와 함께 법무법인 원 제주 분사무소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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