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오브 원' 김기영 영화감독 영화 막전 막후 감상 백미

[코리아데일리] 4일 네티즌 사이에 주목을 받는 영화 ‘파워오브원’의 뜻은 한사람의 힘이란 뜻을 말한다.

그것은 즉, 관객 개인의 힘은 영화의 주인공인 피케이와 같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관객에게 피케이처럼 세상을 바꾸라고 전한다.

그리고 그 관객들은 백인이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백인이니까 당연히 백인이 감정이입을 말한다. 만약 주인공이 흑인이었다면, 그것은 흑인에게 말하는 것이다.

 
근데, 생각해보자. 백인에게 차별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은가? 흑인에게 차별을 당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은가?

당연히 백인에게 말하는 것이다. 백인이 흑인을 물리적으로 구속하고 있는 그 당시에, 힘을 가지고 있는 백인을 설득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 흑인은 이미 차별당하는 것이 싫고 벗어나고픈 욕망을 모두다 가지고 있기에, 흑인을 설득하는 것은 김일성에게 공산주의책을 읽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백인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히지만 이 것응 백인우월주의라고 보기는 힘들다.

▲ 영화 포스터
영화에서 피케이는 어려서부터 흑인의 문물을 접하면서 그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과연 피케이를 백인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내 생각에 피케이의 정신은 흑인에 가깝다.

영화는 내내 "인간은 평등하다. 편견을 갖고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근데 우리는 2시간동안 피케이의 인생을 보고 나서도 그를 겉모습만으로 백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속은 흑인인데도 말이다. 아니, 이 영화를 보고 '그가 흑인이다, 백인이다'고 피케이의 상징성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영화의 교훈을 전혀 흡수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속의 내면은 표현한 것이 역차별같다고 생각할 정도다. 흑인들도 부족이나 추장간의 싸움에서 야만적이고 스스로의 생각에 갇혀 서로를 이해못하고 잔인한 모습을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선 대부분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하는 '평화주의자'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백인에게 흑인의 장점을 어필하기 위해 조금은 '만들어진' 느낌을 갖는다. 하여튼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고 구분하기가 힘들다.

그가 검다면 흑인이고 희다면 백인이고 노랗다면 황인이다.

 
그것은 단지 색의 구분이다. 여기서 색이란 빨강은 공산주의고... 같은 그런 '색'이 아니다.

아무런 상징성이 없는 단지 색의 차이다. 색깔의 차이.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색, 그리고 나라, 가치관등의 차이로 서로를 구분하는 사람의 모순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뷰들에는 영화가 '백인우월주의'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리뷰를 작성한 사람에게 '피케이는 누구인가?'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렇게 답할 것이다.

'피케이는 백인이다.' 하지만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피케이는 사람이다.'

파워오브원 감상 포인트는 광활한 아프리카의 자연환경으로 눈길을 끈다.

줄루족 주술사인 다불라 만지의 의식으로 어린 피케이가 두려워하던 코끼리를 마주하는 장면이나, 성장한 피케이가 웅장한 폭포수 앞에서 깨달음을 얻는 장면, 듀마와 함께 붉은 노을 속으로 길을 떠나는 장면은 신선한 감동을 준다.

 
주인공 피케이의 성장 과정에 맞춰 세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데, 어린 피케이를 맡은 가이 위처(Guy Witcher)는 귀여운 얼굴과 천진난만한 연기로 영화에 재미를 더한다. 18세의 피케이를 뽑을 때는 런던에서만 2천 명의 배우가 오디션을 거쳤다고 한다.

‘파워 오브 원’에서는 음악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음악을 맡은 한스 짐머(Hans Zimmer)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음악으로 영화의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감옥에서 흑인 부족들이 하나로 뭉쳐 합창하는 장면도 영화의 큰 볼거리다.

한편 극중 피케이를 괴롭히던 야피 보타를 연기한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Graig , 6대 제임스 본드)의 젊은 시절 모습도 잠깐 볼 수 있는데, ‘파워 오브 원’이 그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사진=영화 영상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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