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8세 사랑 때문에 왕버린 순정의 애틋한 삶

[코리아데일리 이옥희 기자]

18일 에드워드 8세 삶이 네티즌 사이에 재조명되고 있다,

그 이유는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월리스 워필드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퇴위했기 때문이다.

영국 왕 가운데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 유일한 인물이다. 에드워드 8세는 요크 공작 조지(후에 조지 5세)와 메리 왕자비(후에 메리 왕비) 사이의 큰아들로 태어나 조지가 1910년 5월 6일 즉위한 뒤 웨일스 공(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907~11년 영국 해군에서 훈련받았으나 1914년 8월 6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근위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었고 참모장교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20년대 초에는 대영제국의 친선 도모를 위해 두루 여행을 다녔다.

1928년 아버지 조지 5세가 병에 걸린 뒤부터 점차 국사(國事)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2년 실업률이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영국 전역의 임금노동자 클럽을 방문했고 20만 명이 넘는 남자와 여자를 대상으로 실업자 구제 계획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의 인기는 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웨일스 공이었을 때 누렸던 인기에 견줄 만큼 높았다.

그는 또 1930년부터 심프슨 부인(→ 윈저 공작부인)과 친교를 맺기 시작한 것이 유명하다.

심프슨 부인은 1927년 미국 해군 대위와 이혼하고 1928년 어니스트 심프슨과 재혼한 상태였다.

심프슨 부부는 개인 사교모임의 일원으로 에드워드와 자주 만났고, 1934년에 에드워드는 심프슨 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가 아버지와 이 문제를 의논해보기도 전인 1936년 1월 20일 조지 5세가 죽자 그는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서 에드워드 8세는 왕가의 영지에 과감한 경제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스탠리 볼드윈 총리는 에드워드 8세에게 이혼녀와의 개인적 친분관계가 군주제의 고결함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에드워드는 귀천상혼(貴賤相婚) 형식의 결혼을 논의해보려 했으나 12월 2일 볼드윈은 왕에게 이 일이 실행 불가능함을 분명히 했다.

 
다소 성급하고 강압적으로 언론과 의회에서 모든 문제가 폭로되었던 운명의 날인 12월 3일이 다가왔다. 이튿날 신문에 처음으로 '퇴위'라는 말이 나왔다.

왕은 최종결정을 내렸고 1936년 12월 10일 퇴위 의사를 밝혔다("나 에드워드는 나 자신과 내 후손의 왕위를 포기한다는 취소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음을 선언한다"). 의회는 12월 11일 퇴위 선언 문서를 확인했고 그날 저녁 에드워드는 라디오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고 그 무거운 책임을 짊어질 수도 없음을 알았다."

그날밤 그는 유럽 대륙으로 떠나 오스트리아에서 친구들과 함께 몇 개월을 살았고 심프슨 부인이 최종 이혼판결을 받을 때까지 그녀와는 조심스럽게 떨어져 있었다.

이후 1937년 6월 3일 에드워드는 프랑스 샤토드캉데에서 영국국교회 신부의 주례로 심프슨 부인과 결혼했다. 새 왕이 된 조지 6세는 형인 에드워드에게 1936년 12월 12일 윈저 공작작위를 내렸으나 1937년 내각의 충고를 받아들여 새 윈저 공작부인이 남편이 누리는 '전하'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거부했다. 이 결정으로 에드워드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뒤 2년 동안 윈저 공작 부부는 주로 프랑스에 살면서 독일(1937. 10)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를 방문했다.

한편 1945년 이후에는 파리에서 살았다. 동생 조지 6세의 장례식(1952)과 어머니 메리 왕비의 장례식(1953)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동안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으나 그와 그의 부인이 왕가 일원들과 함께 공식 의식에 참가하도록 처음으로 초대받은 것은 1967년 말버러 하우스에 있는 메리 왕비의 현판 제막식 때였다.

윈저 공작은 부인과 함께 윈저 성 부지 내 프로그모어에 나란히 묻혀 아직도 영국인들 가슴에 옹아리진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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