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 싶다' 북파공작원 살태. '그것이 알고 싶다' 소년들 차출은 무엇때문. '그것이 알고 싶다' 실미도에 얽힌 사연. 아직도 북한정치범 수용소에 북파공작원이...'그것이 알고 싶다'
북파공작원 그들의 애환은 누가? SBS '그것이알고싶다 북파공작원 충격적인 실체는?

[코리아데일리 이옥희 기자]

그동안 한 속에 묻혀있던 1만명에 달하는 북파공작원 그 가운데 7726명이 사망한 사건의 실체적인 내용이 방영 충격을 주고 있다.

▲ 북파공작원의 당시 모습 (자료사진)
북파공작원이란 한국전쟁중인 1952년부터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한 무장첩보원을 말한다.

이 북파공작원들은 최초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처럼 북한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양성됐다. 적 생포 및 사살, 적군진지 주요시설물 폭파, 적지에서 각종 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야기, 첩보수집, 첩보망 구축 등을 주 임무였다.

이들을 선발, 양성한 부대는 '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partment)' 로 불리는 '육군첩보부대'가 모체인 것으로 알려졌다. 48년께 만들어진 이 부대는 60년대말부터는 'AIU(Army Intelligence Unit)'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 고강도 훈련을 받는 북파공작원들
이 곳 말고도 `실미도' 부대 등 북파공작원을 관리하는 특수 침투부대는 여러 곳 더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국군이 아닌 미군 정보부대에 소속돼 북파공작에 종사했던 요원들도 수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공동성명 정신에 따라 서로간에 무장공작원을 파견하지 말자'고 약속한 뒤 북파는 중단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공작원 양성기능은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 직후 창설된 공군 특수부대를 거쳐 국군정보사령부로 이어졌다.

북파공작원들은 원래 군인 신분이었으나 1953년 정전협정이 남과 북의 무력도발을 금지한 까닭에 군과 군의 공개적 전투행위는 불가능해짐에 따라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훈련받고 북파되었다.

이러한 북파공작원이 주목을 받는 것은 28일 밤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공작원 훈련을 받거나 실제로 북파됐던 만 18세 이하 '소년공작원'의 실체를 파헤쳐보고, 혼란한 전시상황이라는 이름아래 감춰진 아픈 과거사를 최초로 고발했기 때문이다.

1955년 6월, 육군첩보부대(HID) 공작원인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마저 사고로 세상을 뜨자, 소년 심한운(당시 8세)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에 있는 육군첩보부대를 찾았다. 하지만 소년은 그곳에서 아버지가 북파 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부대는 소년을 돌려보내지 않고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겠다며 그곳에 남게 했다. 그런데 소년은 그날부터 생사가 넘나드는 끔찍한 훈련을 강요당했다.

▲ 북파공작원들의 희생지 유가족들 눈물의 참 의미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시작된 부대생활이 어느 순간,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변해갔다. 살아있는 뱀을 먹어야 했고, 매일 밤 칠흑 같은 산 속에 홀로 남겨져 술래 없는 숨바꼭질을 해내야 했다.

1951년 당시 14세였던 이대식 군은 가난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신문을 팔던 신문팔이 소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대식 군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는 백방으로 아들을 찾았지만 아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지 60여년, 어느 날 아들의 전사확인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확인서에는 아들이 행방불명 된지 1년만인 1952년 7월 29일 육군첩보부대에서 사망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적혀있었다. 14세 신문팔이 소년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날 방영된 내용중 충격을 더 준 것은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소년공작원'이 여러 명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1951년 6월 파주시 탄현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행방불명된 소년들이었다는 점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코리아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