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영원한 군인 “노병은 죽지 않는다”

[코리아데일리 이상규 기자]

한국군인들의 영원한 아버지 백선엽 장군은 군인이면서 정치인 기업가 사회 사업가이다.

그중에서 백 장군이 기장 좋아하는 것은 군인이면서 사회사업가이다.

백선엽 장군의 유명한 일화는 6.25전쟁 때 다부동 전투가 대표적이다.

▲ 백선엽(예비역 대장) 장군이 육군1야전군사령부 역사관 내 ‘백선엽 장군 역사자료 보존실’에서 ‘상재전장(常在戰場·항상 전쟁터에 있다)’이라는 친필 휘호를 적고 있다
백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명한 다부동 전투를 겪게 되는데, 북한군은 병력 21,500명에 T-34 전차 20대+14대 가량을 앞세워 전진했으나 1사단의 7,600명 병력이 이들을 8월달까지 지연시켜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백선엽은 권총을 들고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는데, 이렇게 사단장이 직접 돌격하는 것은 사단장 돌격이라고 불리며, 국내외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사례중의 하나이고 이는 전설이 되어 지금까지 내여온다.

특히 백 장군은 당시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한 유명한 말이 짐금도 “노병은 죽지않는다”는 백 장군의 전설이되어있다.

한편 백선엽장군은 6.25전쟁 중 국군과 경찰의 유자녀, 전쟁 중 학살과 실종 등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해 서울에 보육원 성격의 유아원을 설립하고 '백선 유아원'이라 한 것이 사회사업의 첫 출발이다.

▲ 백선엽 장군
백선유아원은 1952년 지리산 토벌 작전 뒤 버려진 고아들을 수용해 생활토록 하는 시설로, 당시 전라남도 광주 송정리에 세워졌다..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손을 뗐지만 그 뒤 83년 백선사회봉사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88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 넘겨져 운영되고 있다.

현재는 보건복지부와 광주광역시의 요청으로 정신지체인 아동시설로 운영하였다. 원래 명칭은 설립자인 백선엽을 기리는 의미의 ‘백선’이었으나 여기에 수녀회 성인인 사도 바오로의 영성을 뜻하는 ‘바오로’를 담아 ‘백선 바오로의 집’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사회사업이 백선엽 장군이 가난한 가정에서 면학하였으므로 일부 고학생들의 장학금을 후원하다가 친동생인 백인엽과 함께 인천광역시에 소재해 있는 인천대학교를 비롯한 선인재단의 여러 사립학교를 설립과 운영하였다.

그후 백 장군은 선인재단을 국가에 헌납하여 공립학교로 전환되는 계기를 말들었다. 그후부터 지금까지 백선엽 장군은 안보, 강연활동 등을 다니며 1986년 국토통일원 상임고문에 위촉되었다.

한편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는 2009년에 명예 원수로 추대하려는 계획이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을 손봐야 하기 때문에 아직도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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