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삶 “노병은 죽지 않는다”

[코리아데일리 이옥희 기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예방한 이후 새롭게 조명을 받는 백선엽 장군은 만주국의 간도특설대 군인 장교이자 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 교육인의 길을 걸어온 아름다운 생을 살아오고 있는 참된 위인이다.

백선엽 장군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1945년 광복을 맞았고, 해방 직후에는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 영원한 군인 백선엽 장군
이내 소련군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게 되자, 1945년 12월에 월남하게 된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에서 활동하였고,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 대한민국 국군 장군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제1사단장으로 승진한 뒤, 줄곧 전쟁에 참전하다가 1952년의 휴전 회담 때 한국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휴전문서에 조인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의 외교관을 지냈다.

백선엽 장군은 월남 후 1945년 12월 5일에 만들어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 26일에 국방경비대에 장교로 임관된어 그 뒤 같은 해 1월 15일에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입대하여 제5연대장을 맡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그는 국군 제5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 1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다.

육본 정보국장 재직 중이 발생한 여순 14연대 반란사건(194810)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 및 숙군 사업을 지휘하였다.

▲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 세번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신고를 받는 장면
이때 같은 만주군 출신으로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던 중 체포 처형위기에 처한 박정희(당시 소령)의 목숨을 구해준다. 국방부는 1948년 12월 15일, 육군본부 정보처 소속이던 백선엽 등 8명의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발령하였다.

한편 백선엽 장군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얽힌 일화는 숙군 과정에서 체포된 박정희 소령을 만났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번만 살려달라며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거듭 부탁했다.

박정희 당시 소령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그는 박정희에게 전향을 권고한다. 백선엽은 숙군 과정에서 검거되었던 박정희의 구명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좌익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상태였다.

1949년 초 어느 날 특무대의 김안일 소령은 백선엽에게 박정희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를 만나 줄 것을 부탁했다.

▲ 이승만 시절 승승장구한 백선엽 대장이 경무대 행사에 참석해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
박정희를 만난 백선엽은 도움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국군 내부의 반대와 일부 장교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박정희가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했다.

공식 보직이 부여되지 않은, 편제외 인원으로 비편제 군무원 자격으로 근무하던 박정희에게는 급여가 없었으나, 백선엽은 동료, 부하 장교들을 설득하여 장교들의 월급에서 일부 각출하여 박정희의 문관 월급으로 주었다.

백선엽은 어머니를 옥중에서 잃고, 연인과도 사별하여 의기소침한 박정희를 독려하여 동기를 부여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는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현역으로 복귀하여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후 백선엽 장군은 국군과 경찰의 유자녀, 전쟁 중 학살과 실종 등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해 서울에 보육원 성격의 유아원을 설립하고 '백선 유아원'이라 했다.

백선유아원은 1952년 지리산 토벌 작전 뒤 버려진 고아들을 수용해 생활토록 하는 시설로, 당시 전라남도 광주 송정리에 세워졌다.

▲ 6.25 당시의 백선엽 장군의 모습
또 백선엽 장군은 퇴역 후는 외교관에 임명되어 1960년 7월 주중화민국대사로 부임했다.

박정희 저 대통령와의 인연은 1965년 7월 캐나다 대사로 전보되었다가 1969년 10월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교통부 장관으로 서울의 1기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퇴임 후 반공, 안보 강연을 다녔다.

백선엽 장군은 1971년 충주비료 사장에 선출되어 기업인이 되었고, 한국종합화학공업의 사장을 겸임하였다. 곧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의 한사람에 선출되었다. 1972년 2월 28일 호남비료 사장에 겸임되었으나 얼마 뒤 사퇴하였다. 그 뒤 1972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고 1973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만난 백선엽 장군
.이후 1989년에는 성우회 회장에 선출되어 1991년까지 재직하였고, 1990년 주식회사 한국후지쯔사 고문에 재선출되었다.

그 뒤 2008년 5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다.

2009년 3월 23일, 정부는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기념하여 백선엽을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할 계획임이 보도되었다.

실행된다면 백선엽은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 보유자가 된다.

한편 정부는 그를 명예 원수로 추대함에 따라 한국 전쟁 참전군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언론과 시민단체의 반발로 통과되지 못하고, 백선엽 원수 추대건은 계류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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