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2사태’ 얽힌 실타래 역사 속에 묻힌 1급 비밀 조명

[코리아데일리 이규희 기자]

전두환이란 장군을 대통령으로 올린 기초가 된 12 12사태가 35주년을 맞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1212사태' 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으로 쿠데타를 말한다.

사건의 시작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ㆍ노태우 등이 주동하고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중심이 되어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으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으로 강제 연행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촉발됐다.

▲ 1212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들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1979년 10ㆍ26사건을 계기로 하여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한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ㆍ26사건 수사에 비협조적이라고 하여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한다. 이 일련의 사건에 관여한 사람은 9사단장 노태우를 비롯하여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등이다.

한편, 정승화 총장의 신변안전에 책임이 있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참석 중이었다.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裁可)없이 진행되었고, 사후 재가를 받기 위하여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에게 강압적으로 정승화 총장 연행의 재가를 요청하나 거절당한다.

▲ 전두환 노태우를 대통령을 만든 1212사태가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이에 맞서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노재현에게 대통령을 설득하도록 한다. 마침내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 세력은 제5공화국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다.

대부분의 신군부 세력은 권력의 요직을 차지한다. 즉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고, 그 외에 유병현ㆍ황영시ㆍ김복동ㆍ유학성ㆍ박준병 등은 군의 요직을 차지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실시하여 국가권력을 탈취한다. 그 다음날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다.

그 후로 12ㆍ12사태의 진상은 비밀로 묻혀 있다가, 김영삼 정부가 사실규명에 나서 사법적 심판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규정되고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ㆍ노태우는 구속된다. 그 후 김대중정부는 전두환ㆍ노태우를 특별사면 한 사건으로 근대 역사상 최악의 하극상 군사 반란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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