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문룡 장군 초상화

[코리아데일리 곽지영 기자]

정묘호란의 빌미가 된 모문룡에 대해서 재 조명하면 후금은 천명 6년(1621) 3월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였다.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은 요양이 함락되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변의 진강을 점령했다. 모문룡은 요동 전체를 수복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후금이 대병력을 투입해오자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이러헌 결과네 의해 광해군 13년(1621) 7월 모문룡은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의 미곶에 상륙했다. 평안감사가 올린 장계를 받은 광해군은 대책을 마련하려 한밤중에 비변사 회의를 열었다.

모문룡은 조선에 들어온 이후에도 ‘요동을 수복하겠다’ 고 큰 소리쳤다. 철산, 용천, 의주 등 압록강변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명군 패잔병과 요민(遼民 ; 명의 난민, 요동에서 왔으므로 붙인 명칭)을 수습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토에 들어온 것은 후금을 크게 자극하였다. 요동 석권 이후 후금사회는 대다수의 한인부로(漢人俘虜) 및 민호를 최하층에 두고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으며, 이들의 농업생산과 잉여노동으로 후금이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 한인이 과중한 착취와 민족 차별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주하는 사태가 끊이지 않아 후금의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애써 이룩한 후금의 농경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인의 반란과 도망은 천명 6년(1621) 3월 요양 함락 이래 끊임없이 계속되었는데 대부분 모문룡과 밀통하거나 사주를 받아 일어난 일이었다.

▲ 전투의 장면 (영화의 한 장면)
광해군은 모문룡으로 인해 조선이 병화를 입을 수 있음을 크게 우려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내에 머물자 후금과의 접촉도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이 조선에 들어오자 요민들과 명군 패잔병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광해군 13년(1621) 12월 후금의 아민(Amin ; 阿敏)은 모문룡을 치려 5천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후금군은 의주, 가산, 용천 등지를 습격했고 모문룡은 용천 관아에 있다가 조선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간신히 탈출했다. 이 기습으로 요민 578명이 죽었다.

광해군 14년(1622) 11월 모문룡은 광해군의 권유대로 평안도 철산 앞 바다에 있는 섬인 가도(椵島)로 들어갔다. 가도는 고려가 몽고 침략을 받을 때 서북면병마영이 설치된 곳이다.

조선은 이 곳을 목마장으로 운영해왔다. 명군과 난민 등 1만여 명이 가도에 몰려들었다. 모문룡은 여기에 진을 치고 동강진(東江鎭)이라 하였으며 명과 조선으로부터 식량, 병기 등을 공급받고 계속하여 후금을 교란하였다. 모문룡의 후방 교란으로 후금의 요서 진출은 큰 제약을 받았다. 명은 모문룡에게 총병좌도독(摠兵左都督) 직을 주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모문룡의 가도 주둔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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