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데일리 강동우 기자]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무량(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 경기도 수원 출신이다.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원양(元陽)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고, 큰형은 영교(泳敎), 작은형은 영호(泳好)이다.

1872년(고종 9) 철종의 부마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금릉위(錦陵尉)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에 봉해졌다.

큰형을 따라 박규수(朴珪壽)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이동인(李東仁) 등 실학자,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학맥을 이은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과 개화당(開化黨)을 조직하였다.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을 일본 정부와 협의하기 위한 특명 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 약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 정계의 지도자 및 구미 외교 사절들과 접촉하여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명치일본(明治日本)의 발전상을 살펴보았다. 이때 항해하는 배 위에서 태극사괘(太極四卦)의 국기를 제정,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용하였다.

1883년 초 귀국한 뒤 한성 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博文局)·순경부(巡警部)·치도국(治道局) 등을 설치하여 신문 발간과 신식 경찰제도의 도입, 도로 정비 사업, 유색의복(有色衣服) 장려 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폈다.

그러나 민태호(閔台鎬)·김병시(金炳始) 등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혀, 삼국(三局)은 폐쇄되고 광주 유수 겸 수어사(廣州留守兼守禦使)로 좌천되었다.

이때 수어영에 연병대(鍊兵隊)를 신설하여 신식 군대의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또다시 수구파가 이를 문제 삼자 같은 해 12월 사임하였다. 그러나 1883년 그의 노력으로 『한성순보(漢城旬報)』의 창간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정계 진출이 계속 좌절되자, 1884년 2월 미국 유람을 계획하였으나, 역시 이뤄지지 못하였다. 이 때 개화당 인사들이 정권 장악을 기도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먼저 미국에 협조를 얻고자 접촉하였으나 미국의 불응으로 어렵게 되자, 다시 일본에 접근하여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군사적 지원에 대한 확약을 받아냈다.

같은 해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친청수구파(親淸守舊派)를 숙청하고 혁신 내각을 수립하여 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前後營使兼左捕盜大將) 직을 맡아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청국군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정변이 삼일천하(三日天下)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본국 정부의 집요한 송환 기도가 있었지만, 일본 정부의 냉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그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야마자키(山崎永春)로 이름을 고친 뒤, 명치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1888년초 일본에 있으면서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관해 13만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개혁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개화상소(開化上疏)’ 혹은 ‘건백서(建白書)’이다.

상소문에서 봉건적인 신분 제도의 철폐, 근대적인 법치 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 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그의 개화 정치에 대한 이상이 설계되어 있으며, 그 뒤 그가 시행한 개혁 정치는 그것의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1893년 말 후쿠자와(福澤諭吉) 등 일본 조야(朝野)의 유력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동경에 친린의숙(親隣義塾)이라는 사립 학교를 세워 유학생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이때 조선 정부의 밀명을 맡고 이일직(李逸稙) 등이 박영효를 암살하고자 친린의숙에 잠입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894년 봄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그 해 8월 귀국하였다. 그 뒤 조선 정부에 친일 세력을 만들려는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제2차 김홍집내각의 내부 대신으로 입각하였다.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퇴조하자 불안을 느껴 이노우에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킨 뒤 독자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개혁은 근대적인 내각 제도의 도입, 지방 제도의 개편, 새로운 경찰·군사제도의 확립 등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조선의 부국 강병을 도모하는 한편,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실과 이노우에공사로부터 배척당하고 1895년 7월 역모를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상소를 통해 자신의 역모 혐의의 부당함을 고종에게 호소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1898년에 접어들면서 독립협회(獨立協會)가 강력한 정치 단체로 부상함에 따라 본국에 이규완(李圭完)·황철(黃鐵)·이정길(李鄭吉) 등의 심복을 밀파하여 독립협회와의 제휴를 통한 자신의 정계 복귀를 기도하였다. 그 결과 독립협회의 신진 소장파가 중심이 되어 그의 소환서용운동(召喚敍用運動)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수구파 대신들은 오히려 이를 구실로 독립협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계획을 바꿔 1900년 7월 본국에 밀파되어 있던 이규완 일행에게 의화군 강(義和君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 음모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음모도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그의 정계 복귀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고, 궐석재판결과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1907년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체류하다가 상경, 궁내부 고문 가토(加藤增雄)와 접촉, 공작하여 고종의 특사조칙(特赦詔勅)을 제수 받았을 뿐 아니라 성대한 환영식과 연회로 정계 복귀를 할 수 있었다.

이어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궁내부 대신에 임명되어, 통감 이토(伊藤博文)와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고종 양위 압력을 무마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뒤 군부(軍部) 내의 반양위파(反讓位派)와 통모,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 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국권이 늑탈된 뒤 일제가 회유 정책의 일환으로 수여한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조선귀족회회장, 1918년 조선은행이사를 역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유민회(維民會)·동광회(同光會)·조선구락부(朝鮮俱樂部)·민우회(民友會) 등 친일 내지 개량주의적 단체와 관계를 맺었다.

한편,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부의장 재직 중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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