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데일리 정은채 기자]

조선시대 도교의 재초(齋醮)를 거행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인 소격소가 지난 12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야경꾼 일지’에 방영된 이후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다소 생소한 소격소는 고려 때부터 소격전(昭格殿)으로 불렸으나, 1466년(세조 12)에 개칭하고 규모를 축소시켰다. 1392년 11월에 고려 때의 재초 장소였던 복원궁(福源宮)·신격전(神格殿)·구요당(九曜堂)·소전색(燒錢色)·대청관(大淸觀)·청계배성소(淸溪拜星所) 등을 폐지하면서도 송도의 소격전은 남겨 두었다.

1396년(태조 5) 정월에 좌우도(左右道)의 정부(丁夫) 200인을 징발하여,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자리에 소격전을 영조하였다. 태종은 재초에 관심이 컸고, 당시 소격전의 제조(提調)를 지낸 김첨(金瞻)과 공부(孔俯)가 도교 재초에 조예가 깊고 열성이 있어 소격전은 비교적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소격서에는 삼청전(三淸殿)이 있어 삼청 성신(星辰)의 초제를 관장하였는데, 제조(提調) 1인, 별제(別提)와 참봉 각 2인, 잡직으로 상도(尙道)와 지도(志道)가 각 1인씩 있었다.

소격서의 초제에 직접 참여하였던 성현(成俔)은 ‘용재총화 慵齋叢話’에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소격서에는 태일전(太一殿)·삼청전 및 내외제단(內外諸壇)이 있어서 옥황상제를 비롯한 수백 개의 신위(神位)와 상(像)들이 마련되어 있고, 헌관(獻官)·서원(署員) 및 도류(道流:조선의 도사)가 분담하여 재초를 집행하였다 한다.

규모가 작았지만 재난이나 경사를 당하였을 때 효과적으로 재초를 집행하도록 조직이 되어 있었다. 이능화(李能和)는 그 밖에도 소격서에 직수전(直宿殿)과 십일요전(十一曜殿)이 있었다고 주장하나 상세한 내용은 알아 볼 길이 없다.

연산군과 중종 2대에 걸친 시대에는 소격서의 혁파문제를 둘러싸고 왕실과 유신(儒臣)들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벌어졌다. 연산군 때에는 소격서가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혁파되었으나, 위판도 보존되고 초제도 여전히 집행되었다.

연산군을 몰아 내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 혁파문제가 본격화되어 끈질기게 논란이 계속되었다. 조광조(趙光祖)를 선두로 한 신진사류들은 강경하게 소격서의 혁파를 중종에게 요청하였으나, 조종(祖宗:임금의 조상) 이래로 지켜 내려온 제도이므로 경솔하게 없앨 수 없다 하여 중종은 거부하였다.

이에 신진사류들은 도교는 세상을 속이고 세상을 더립히는 좌도(左道), 즉 이단이므로 소격서는 혁파되어야 하고, 또한 하늘에 대한 제사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데 일개 제후인 조선왕이 하는 것은 예에 어긋나므로 소격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쌍방의 완강한 대립으로 인하여 과거의 시행이 어렵게 되고, 조광조 등이 밤중까지 물러가지 않고 집요하게 혁파를 요청하는 바람에, 중종은 1518년에 결국 뜻을 굽혀 소격서의 혁파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1519년(중종 14)에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사류들은 참화를 당해 제거되는데, 소격서 혁파문제와는 관련이 없었으나 일부에서는 무인년의 소격서 혁파와 기묘년의 사화를 직접 관련시켜 논하기도 한다.

소격서를 혁파하게 되자 정원(政院)에서는 충청도에 있던 태일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고, 중종은 본원인 소격서를 없애버렸으니 태일전과 같은 지엽적인 것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여 같이 혁파되었다.

기묘사화로 신진사류가 숙청된 뒤에 중종은 모후(母后)의 병중 간청이라 하여 소격서를 부활시키고 초제와 기도를 행하게 하였다. 이후에도 조정 신하들의 간언이 계속되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렇지만 소격서에서 행해지던 양재기복의 과의적(科儀的)인 도교는 유교로 사상을 통제하던 조선에서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겪은 뒤 선조 때 아주 폐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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