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데일리 김효연 기자]

영화 ‘명량’의 개봉과 께 임진왜란 당시 13척의 배를 끌고 왜선 130여척을 격파한 ‘명량해전’은 위기를 극복한 이순신 리더십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잇는 내용이 주목을 받은 가운데 알려지지않았던 이순신 장군의 인간성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方震)의 딸인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海州 吳氏)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玉浦)와 합포(合浦)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옥포해전), 다음날에도 적진포(赤珍浦)에서 1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적진포해전). 이 전투들에서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종2품 가선대부(家善大夫)로 승진했다.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해 사천(泗川)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사천해전). 이 전투에서는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

▲ 이순신 장군 초상화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는 당포(唐浦)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으며(당포해전), 7월 13일(음력 6월 5일)에는 왜군이 도주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唐項浦)를 공격해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다(제1차 당항포해전). 이러한 잇따른 승리로 이순신은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이순신에게 잇따라 패배한 왜군은 수군의 모든 역량을 전라도로 집결해 맞서려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8월 14일(음력 7월 8일) 견내량(見乃梁)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한산도(閑山島)로 유인해 50여척의 왜선을 격파ㆍ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한산도대첩).

그리고 안골포(安骨浦)에서 지원하러온 왜군을 다시 물리쳤으며(안골포해전), 10월 5일(음력 9월 1일)에는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釜山浦)에서 왜군의 병선 100여척을 파괴했다. 이러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이순신은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으며, 9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음력 3월 4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침시켰고(제2차 당항포해전), 11월 11일(음력 9월 29일)에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長門浦)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장문포해전).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둔전(屯田)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

하지만 당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로 옮겼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요시라(要時羅)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 과저에서 자신을 모함한 조정 대신들을 향해 베푼 인간미가 사학자들 사이에 재조명을 받고 있다.

덕분에 이순신은 영웅을 넘어서 ‘민족의 성웅’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이순신이 ‘반인반신’의 범접하지 못할 성인은 아니다. 그 역시 인간적인 결점이 있었고 실수가 있었다. 애초부터 영웅으로 태어난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영화 명랑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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