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이산의 정조대왕과 홍국영

[코리아데일리 박지수 기자]

이조 정조시절에 꼭 등장하는 홍국영은 1748(영조 24)∼1781(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덕로(德老). 양보(良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창한(昌漢)이고,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낙춘(樂春)이다. 큰아버지는 낙순(樂純)이며, 정조의 외조부인 우의정 홍봉한(洪鳳漢)과 이조판서 홍인한(洪麟漢)은 가까운 집안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1771년(영조 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설서가 되었다. 이 때 영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그 소생인 손자(뒤의 정조)를 후계로 정하였다.

영조 말년 벽파의 횡포 속에서 세손을 보호한 공로로 세손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어 사서에 승진했고,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홍인한·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해 실각시켰다.

또한 1776년 홍상간(洪相簡)·홍인한·윤양로(尹養老) 등이 세손을 모해하려는 모역을 적발해 처형시켰다. 그 해 정조가 즉위하자 곧 동부승지로 특진하였다. 그 뒤 날랜 군사를 뽑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해 숙위대장을 겸직하는 등 왕궁호위를 전담하고 도승지에 올랐다.

실권을 잡은 그는 삼사(三司)의 소계(疏啓: 상소문과 계문), 팔로(八路)의 장첩(狀牒: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나 공문서), 묘염(廟剡: 관아의 관원을 의정부에서 천거해 뽑음), 전랑(銓郎)의 임명 등을 모두 알거나 볼 수 있었다.

이 같은 권세로 당시 삼공육경(三公六卿)까지도 그에게 맹종하게 되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조정 백관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도 그의 말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모든 관리들이 그의 명령을 얻어야 행동할 수 있어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 홍국영
1778년(정조 2)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바쳐 원빈(元嬪)으로 삼아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원빈이 20세도 못 된 나이로 1년 만에 병들어 죽자,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 인(恩彦君裀)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에 봉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를 상계군(常溪君)으로 봉하고 왕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는 등 세도정권 유지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중에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1780년 음식에 독약을 섞어 왕비를 독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집권 4년 만에 축출당하였다.

그 뒤 고향에 내려와 칩거하던 중 병을 얻어 죽었다.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로 이조참의·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일설에는 자진해서 물러가라는 정조의 권고로 일시 은퇴하였다가 삼사의 탄핵으로 숙청되는 비운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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